화이트 마운틴 등반기 2009
우리 산이좋아 등산클럽은 주로 뉴욕 주 해리만 파크(Harriman State Park)의 세븐 힐(7 Hills)을 무대로 매주 토요일 아침 8시에 세바고 비치(Sebago Beach)로 연결되는 세븐 레이크 로우드(Seven Lakes Road) 입구에 있는 첫 번째 주차장에서 만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예외가 없다. 그날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그날 산행을 도모하는데, 오전 8시에 출발하여 다시 그 곳으로 돌아올 때 시간은 대략 오후 2시경이 된다. 11월이면 필자가 이 모임에 가입한지가 3년이 된다.
우리 산이좋아 등산클럽(대장 송아중)은 지난 봄 3월경부터 올해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등반할 산을 미 동북부에서 가장 높은 산(Washington Mountain)이 있다는 화이트 마운틴(White Mountains)으로 정하고 2박3일간의 캠프장 예약, 등반계획 및 진행을 그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 우리 회원 가운데 마이클 김 선생이 맡았다.
휴일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떨어지면, 대개 그 전날(금요일)이나 그 다음날(월요일)을 포함하여 연 3일을 놀게 되는 소위 긴 주말(Long Weekend)이 되기 때문에 대개 2박3일의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번 7월 4일이 토요일에 떨어지기 때문에 금토일 3일을 쉬는데 우리는 토일월로 착각하여(일요일에 떨어질 때는 토일월을 놀게 됨) 계획을 짜고 진행한 결과 함께 떠나기로 약속한 16명의 회원가운데 월요일을 재낄 수 없는 2명이 결국 긴 여행을 포기하게 되었다. 여하 간에 우리는 수개월 전부터 캠프장 예약을 해놓았고 그제 와서 그 것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처음 계획대로 진행하였다.
우리는 토요일 오전 7시에 각자 자기 집에서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 출발하였다. 약 2시간정도 지난 오전 9시경 4대의 차에 분승한 이 날 떠나는 대원들이 뉴욕 스루웨(New York Thruway, I-87)이 20번 출구(Exit 20) 직후에 나오는 휴게소에서 서로 반갑게 만났다. 우리는 여기서 커피나 간단한 요기를 하며 서로 정담을 나누고 버몬트(Vermont)를 지나 뉴 헴프셔(New Hampshire)의 우리의 목적지에 이르는 도로를 타고 계속 북동쪽으로 올라갔다. 뉴 햄프셔에 진입하기 바로 전 약 15년 전 우리 아이들과 마지막 스키여행을 갔던 버몬트의 킬링턴(Killington) 산길을 지나갔다. 일순간에 불과했지만, 그 때 마냥 즐겁고 상기된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 때 감회가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잠시 되살아 다가왔다. 오후 1시경이 되자 모두들 시장기를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또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떠났다.
우리가 택한 도로들이 시골 동네를 지나는 길들이어서 예측한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운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후 4시가 지나서야 간신히 화이트 마운틴 국립공원지역(White Mountain National Forest)에 있는 캠프장에 도착하여 등록을 마치고 우리가 2박3일간 묵을 캠프 사이트에 짐을 풀려고 할 때 제법 굵은 소나기가 내렸다.
저녁 6시쯤 축축한 땅위에 각자 텐트를 치고 캠프 파이어(Camp Fire)를 지피고 저녁 준비를 하였다. 긴 여행에 약간 지친 대원들이 각자 텐트에 각자 짐을 풀고 캠프 파이어 주위에 모여들었다. 우리는 고기도 구우며 술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월요일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금요일에 출발했던 김정조 대원이 부인과 두 딸(수경 7살, 선경 5살)을 데리고 반가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저녁 8시경 대원들은 밤 산보를 나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수면부족과 술기운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간신히 잠이 들려는 참에 밤 산보를 나간 대원들이 돌아오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렸다. 이 여행을 위해서 나는 2인용 텐트를 구입했는데, 너무 비좁아서 좀 더 큰 텐트를 구입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캠프 여행에 경험이 많은 마이클 김 선생은 부부가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넓고 높은 5인용 텐트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새벽 5시경 잠이 깨었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일찌감치 일어나서 세면장에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니 몇몇 대원들이 일어나서 라면 물을 끓이고 있었다. 오늘 산행은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미동북부에서 가장 높다는 워싱톤 마운틴의 정상(Mount Washington Summit, 6288ft, 1917m)까지 오르는데 도보로 오르는 사람들과 차로 오르는 사람들로 나누었다. 산꼭대기에 오르는 길은 기차, 자동차, 도보 등 3가지가 있었다. 마이클 김선생은 자동차로 오르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송대장과 나는 자진해서 따라 나선 두 여성대원(아가다, 미쎄스 안)을 데리고 도보로 오르기로 하였다. 오후 2시경 산꼭대기에서 자동차로 오르는 사람들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우리 네 사람은 워싱톤 마운틴의 꼭대기에 오르는 주차장으로 향하였다. 주차장은 오전 이른 시간인데도 등반 객들의 차들로 꽉차있었다. 송대장은 언제나 그렇듯이 대장답게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어떤 트레일(Trails)을 타야하는지 미리 지도를 공부해 와서 별로 망설임도 없이 착착 앞으로 나아갔다. 오전 9시반경 우리는 워싱턴 마운틴 꼭대기에 이르는 여러 트레일 가운데 가장 경치가 좋다는 터커맨 러빈 트레일(Tuckerman Ravine Trail, 4.1miles)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러빈(Ravine)은 흐르는 물에 침식되어 생긴 계곡 또는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약 1천 피트 지점에 금강산의 구룡폭포를 비스름하게 닮은 폭포가 있었다. 하늘과 맞닿은 듯 높은 계곡의 꼭대기에서 굵은 물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푹 파인 웅덩이에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움푹 파인 웅덩이에 몸을 둘둘 감은 용이라도 들어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약 4천 피트 높이까지는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고 별로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가끔 스키와 부츠를 메고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여름에 스키를 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다.
도중에 두 그룹의 젊은 아이들(고등학생들처럼 보였음)을 만났는데, 한 그룹은 남학생 그룹이었고, 또 한 그룹은 여학생 그룹이었다. 약 4천 피트 높이 이상은 운무(구름 안개)가 휘감고 있어 산꼭대기가 보이지 않았고 운무로 덮인 산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폭포 줄기들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약 4천 피트 높이에 이르렀을 때 계곡에 녹지 않은 눈덩어리들을 볼 수 있었고, 그 옆을 지나갈 때 거센 바람이 불어 마치 눈보라치는 추운 겨울 날씨를 방불케 하였다. “싸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 나오는 어느 한 장면을 연상시켜주었다. 어떤 부분은 두텁게 쌓인 눈덩어리 위를 지나가야 했다. 가끔 위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알아보니 바람이 거세게 불고 일기가 불순하여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나니 우리도 은근히 두려움이 생겼다. 우리도 안전하게 오던 길을 내려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우리 앞뒤에서 함께 움직이는 두 그룹의 남녀학생들을 보면서 제들도 올라가는데 우리가 못 올라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도로 내려간다는 것은 송대장과 나를 믿고 따라오는 두 여인들에게도 자존심을 꾸기는 일이기도 하였다. 물론 안전수칙은 자존심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두 그룹의 남녀학생들의 지도자들이 그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계속 오르는 것을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험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송대장과 나는 우리를 믿고 따르는 두 여인을 데리고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구름 안개 속을 헤치며 가끔 세차게 불어대는 찬바람을 맞으며 계속 앞으로 위로 나아갔다. 가도 가도 끝이 나올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 거꾸로 하산하는 등반 객들을 마주치면 저 사람들은 우리가 올라온 길을 내려가는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내려온 길을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무수한 쪼개진 바위들로 형성된 등반길을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배도 고팠다. 비상식량(에너지 바)을 꺼내서 씹어 먹고 물을 마시며 정처 없는 사람들처럼 넘어지면 큰 일 날 것 같은 무수히 쪼개진 큰 바위 길을 운무를 헤치며 계속 걸었다. 오후 1시반경 짙은 구름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보였다. 드디어 정상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꼭대기까지(4.1 miles) 도달하는데 약 4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산꼭대기에 마련된 휴게소는 등반객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따끈한 수프를 시켜서 마이클 김선생이 전날 밤 손수 만들어 싸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차가운 바람과 구름 안개로 굳어있는 몸과 마음을 녹였다. 2시가 지나도 마이클 김선생이 인도하는 자동차부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온 길을 도보로 내려가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셀폰이 터지지 않아서 공중전화를 이용하여 교신한 결과 그 분들이 약속대로 차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다리는 동안 휴게소 밖을 내다보니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기차가 올라와 쉬고 있었다. 오후 3시경 마이클 김선생 일행이 휴게소로 마치 우리를 구조하러 온 구조대원들처럼 들이닥쳤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기념촬영을 하고 그분들의 차에 나눠 타고 하산을 시작하였다. 산 능선을 굽이굽이 타고 닦인 도로가 매우 위험하게 느껴졌다. 아차하면 천길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구름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4천 피트 높이에 이르니 맑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고 주변의 산들과 군데군데 보이는 작은 동네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였다. 장관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산꼭대기에서 주위의 4개주(New Hampshire, Vermont, New York, Connecticut)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4사람은 뭔가 해냈다는 자랑스러운 성취감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 5시경 캠프장에 돌아왔다. 땀에 쩔은 몸을 씻고 “리브 아이”(Rib Eye)를 구워서 위스키를 마시는 기분이란 끝내주는 것이었다. 이날(둘째 날) 저녁은 날씨도 쾌청하고 등산으로 노곤한 몸에 상추, 풋고추, 마늘, 된장, 구운 고기, 등으로 짜인 저녁식사가 일품이었다. 저녁을 마치고 소화를 돕기 위해 밤 산보를 나갔다가 돌아오니 저녁 10시가 지났다. 우리는 각자 천막에 들어가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셋째 날(월요일)이 밝았다. 오늘은 우리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아침 요기를 간단히 마치고 우리가 묵었던 캠프장 근처의 왕복 2시간정도의 등산 트레일(Cherry Mountain Trail, 1.7miles)을 다녀왔다. 오전 11시경 우리는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면서 2박3일간 우리들의 임시 주택이었던 천막을 거두었다. 점심은 어제 먹고 남겨둔 리브 아이 구이. 정오가 지나서 우리는 캠프장을 떠나 우리들이 이틀 전 떠나온 고향으로 달렸다. 포트 리(Fort Lee)의 감미옥이 우리들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올라 올 때는 뉴욕 올바니(Albany, New York)쪽으로 올라왔는데, 내려 갈 때는 코네티컷 하트포드(Hartford, Connecticut)쪽으로 내려갔다. 저녁 7시경 우리는 무사히 감미옥에 도착하여, 마지막 회포를 풀었다. 저녁 8시 반경 우리는 회자정리의 아쉬움을 털어버리며 서로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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