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리 센세이와의 일본관광여행 2012
김성준(Moses S. Kim)
이 글은 뉴욕일보에 04/30(월), 05/01(화), 05/02(수), 05/07(월), 05/08(화), 05/09(수) 6회에 걸쳐 연재되었음. www.newyorkilbo.com 에 들어가서 "전자신문"을 클릭하면 지나간 신문을 볼 수 있음.
기획 - 벚꽃이 만개하는 4월 초순
이번 일본 관광여행은 나의 오랜 친구 김선호 치과의사의 기획으로 작년 가을부터 약 6개월에 걸쳐 준비되었다. 김선호는 서울고등학교 동문이자 내 치과의사로서 198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으로부터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도모하는 통일운동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 한반도 국제 정세, 한국의 현 시국, 등에 대해 나와 공통적 인식을 가진 지성인으로서 나의 오랜 친구이다. 재작년 일본관광을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하였는데, 그때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고, 작년에 일본 동북부 센다이 지역을 초토화 시키고, 후쿠시마 원전을 파괴한 대 지진으로 유야무야 되었었다. 작년 가을 또다시 일본관광을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이번에 나는 올해 65세가 되는 인생의 전환점으로 무엇인가 특기할만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의 일본관광 제안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번 일본관광여행은 하나에서 열까지 일어를 잘하고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온 김선호의 기획물이었다. 관광 시기, 항공기 및 호텔 예약, 일본 내 교통편 및 식사계획, 등을 알차게 짜가지고 세 차례의 예비모임을 거쳐 결국 우리 두 부부가 함께 떠나는 여행이 되었다. 출발 시기는 벚꽃이 만개하는 4월 초순이었다.
출발(3월 29일 목요일 오후) - 도착(3월 30일 금요일 저녁) - 오사카 도톤보리 거리
항공기편은 뉴욕 JFK 공항 - 오사카 간사이 공항을 잇는 China Airlines(Taiwan)이었다. 우리는 3월 29일 목요일 오후 2시 30분 JFK를 출발하는 그 비행기에 탑승하기위해 일찌감치 플러싱을 떠나 JFK로 향하였다. 우리를 태운 보잉 747 점보 비행기는 드디어 오사카 간사이 공항을 향하여 힘차게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비행시간과 거리는 서울 가는 것과 비슷하였다. 지루한 13시간의 비행 끝에 간사이 공항에 내린 시간은 현지시간 3월 30일 금요일 저녁 6시 10분. 간사이 공항에서 우리가 첫날밤을 지낼 오사카 까지 난까이 전철로 약 40분. 차창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봇짐은 등과 어께에 매고 바퀴 달린 여행가방을 끌며 전철역을 빠져나오자 거리는 벌써 불야성을 이루고 오가는 행인들로 붐볐다. 우리는 신뢰하는 가이드 김선호의 뒤를 따라 난바 상점거리를 통과하여 예약된 난바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 방은 그 크기가 게딱지만하여 마치 작은 감방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있어야할 것은 다 있었다. 앞으로 알게 되지만 호텔마다 비데가 있는 것이 맘에 들었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가 통과해 들어온 거리로 다시 나갔다. 금요일 저녁이라 거리는 인파로 붐비고 식당들은 지나가는 손님을 잡기위해 호객행위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참 열심히들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줄곧 알게 되지만 거리들은 쓰레기, 담배꽁초, 가래침, 포장도로 위에 들러붙은 껌, 등이 전혀 보이지 않고 깨끗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일본사람들이 퍽 인상적이었다. 활기찬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 모습이 비슷하여 한국에 온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센세니치 마에 거리의 한 실비식당에서 처음으로 사시미, 스시, 우동, 사케, 등으로 배를 채우고 서울의 청계천처럼 꾸며진 도톤보리 개천도로를 따라 밤거리를 산책하다가 늦은 밤 호텔로 돌아왔다.
3월 30일 토요일 - 오사카 시 우메다 역(Oska City Station), 오사카 성, 히메지
아침 8시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기위해 한 길 건너에 있는 구로몬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 안의 상인들은 그날 장사를 위해 가게를 차리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는데 우리가 찾는 식당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시장 밖으로 나오자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가 종일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구하려고 하는데 한 가게 주인이 투명한 비닐우산 네 개를 공짜로 주어서 그 우산을 각자 하나씩 쓰고 큰 길 가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우리들은 일본에서 첫 번째 아침식사를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공짜로 얻은 비닐우산은 어딜 가나 필요할 때 집어가고 필요 없을 때 놓고 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우산이었다. 물론 그런 우산을 파는 데도 있었지만. 길거리로 나오니 비는 더 줄기차게 내렸다.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하고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예정된 관광을 시작하였다. 오늘 관광지는 오사카 성이었다. 바퀴달린 여행가방이 가장 큰 짐이었고 이 짐을 끌고 다니며 관광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짐을 임시로 넣어둘 라커를 찾아 이곳저곳 오사카 우메다 역 안을 뒤지며 헤맸다. 오사카 시 역(Oska City Station)은 상점들과 인파로 붐비는 휘황찬란한 지하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도록 우리는 빈 라커를 발견하지 못하여 이리저리 헤맸다. 배가 출출해졌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전철역 구석 먹거리 골목으로 바퀴달린 여행가방을 끌고 들어가서 마땅한 식당을 찾았다. 어머니라는 간판이 붙은 한식집에 들어갔다. 기왕이면 우리 동포를 돕자는 뜻도 있었다. 게딱지만한 공간에 어머니와 딸과 사위(또는 아들과 며느리) 3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부침개, 김치찌개, 돈까스, 막걸리, 등. 우리는 미국 뉴욕에서 온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일어로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여행가방을 끌고 또 다시 라커를 찾아 나섰다. 번화한 역에서는 빈 라커를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적한 오사카 성 부근 텐마바시 역으로 갔다. 그 역에 가니 빈 라커가 여러 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내내 찾다 못 찾은 빈 라커를 발견하자 너무나 반가웠다. 우리는 여행가방을 쳐넣고 비도 멎고 해도 보이고 해서 아침에 구로몬 시장에서 공짜로 얻은 우산도 집어넣고 오사카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사카 성문으로 향하는데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커에 넣고 온 우산이 생각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오사카 성안으로 들어갔다. 도처에 즐비한 벚나무들은 꽃망울을 움츠리고 아직도 우리가 보기를 원했던 활짝 핀 꽃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동상, 우뚝 솟아있는 오사카 성, 등을 간간이 소나기가 멎는 틈을 타서 돌아보고 우리는 자기를 싫어하는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수길이가 궂은 날씨로 행패를 부린다고 농담을 하며 오사카 성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역으로 가서 여행가방과 우산을 찾은 다음 고베를 경유하여 히메지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다. 히메지의 예약된 호텔에 투숙했을 때는 늦은 밤인데다, 이날 라커를 찾느라 헤매고 궂은 비바람에 젖고 열차시간에 쫒기고 여자들은 지쳐서 꼼짝도 하기를 싫어했다. 김선호와 나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까운을 입고 호텔 1층에 있는 목욕탕으로 내려가서 목욕을 하였다. 어떤 젊은 부부와 애들도 까운을 입고 목욕탕으로 라비로 가로 질러 다녔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까운을 입고 호텔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일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우리는 저녁을 거르고 잠자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 김선호의 여행계획은 보고 싶은 명소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그 일정을 다 소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알게 되지만 시간상 가볼 수 없는 곳은 지나치는 수밖에 없었다.
4월 1일 일요일 - 히메지 성, 벳부 온천
히메지의 이 호텔은 아침식사가 제공되었다. 뷔페로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 어제 저녁을 걸렀기 때문에 아침식사가 더 맛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4월 3일부터 4월 5일까지 3박을 하게 될 교토 도큐호텔로 여행가방을 택배로 부치고 앞으로 2박 3일 동안 필요한 옷과 세면도구를 등가방과 손가방에 넣어서 어께나 등에 메고 우리는 히메지 성을 구경하러 갔다. 히메지 성은 원래 흰색으로 우아하게 치장되어있어 벚꽃이 만개했을 때는 기막히게 수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는데, 마침 대대적 복구공사를 하느라고 성의 중심부분을 가려놔서 볼 수 없었고, 여기저기 즐비한 벚나무들도 꽃망울을 움츠리고 있어 이른 봄의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이드 김선호는 자기 탓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제 오사카 성과 오늘 히메지 성에서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썰렁한 히메지 성을 빠져나와 우리는 신 고베 역에서 일본의 남부 규슈로 가는 신칸센 특급열차(Bullet Trains)에 몸을 실었다. 이 고속 열차는 무서운 속도로 총알처럼 달렸다. 앞으로 점점 확실히 알게 되지만, 일본은 철도의 왕국이다. 고속철, 전철, 지하철, 등이 일본열도를 사통팔달 일일생활권으로 연결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요 뱃길인데 세월아 내월아 운하를 파서 뱃길을 만들겠다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고꾸라에서 열차를 바꿔 타고 벳부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벳부 역에 도착했을 때 벌써 해가 저물었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벳부의 한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우리가 오늘 밤 묵을 하까다로 돌아와 하까다 역 앞에 예약된 Comfort Hotel에 투숙한 때는 밤 10시쯤 되었다. 긴 하루였다. 여장을 풀고 밤거리로 나와 와타미 라는 체인 식당에 가니 11시가 음식이 나오는 마감시간이었다. 음식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여 기분 좋은 저녁식사가 되었다. 하카다의 밤거리는 한적하였다.
4월 2일 월요일 - 마이쯔루 공원(구 후쿠오까 성), 니시 공원, 구마모토 성, 가등청정
Comfort Hotel의 방은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호텔이 제공하는 아침식사도 뷔페식으로 푸짐하고 맛이 있었다. Wi Fi 가 열려있어 가지고 온 아이패드를 펴들고 오랜만에 이메일, 카카오 토크로 뉴욕의 우리 아들에게 일본에 도착한 이후 첫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9시경 체크아웃하고 마이쯔루 공원(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의 부하 구로다 나가마사가 세운 후쿠오까 성터로 복구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음), 후쿠오카 지역서 유일한 일본 100대 벚꽃명소로 날씨가 좋으면 한국 부산 태종대가 보인다는 김선호의 믿기지 않는 말을 들으며 니시 공원으로 갔다. 벚꽃은 마이쯔루 공원보다 못하였지만, 젊고 잘생긴 아가씨가 약 장수 같은 말솜씨로 삥 둘러선 군중을 상대로 원숭이 쇼를 보여주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그다음 김선호는 신칸센 열차를 타고 우리를 구마모토 성으로 인도했다. 구마모토 성의 벚꽃은 우리가 일본 땅을 밟은 후 처음으로 보게 된 일본 남부지방의 만개한 최상급 벚꽃절경이었다. 관광객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삼아 자신들의 모습을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일본에 대한 역사적 감정이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벚꽃이었지만, 과연 벚꽃은 아름다웠고 일본은 아름다운 벚꽃을 국화로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마모토 성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풍신수길의 부하 장군으로 함경도까지 쳐들어왔던 가등청정의 큰 동상이 서있었는데, 그 동상의 뒤로 구마모토 성 외곽을 따라 흐르는 수로를 따라 포장마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가등청정의 동상 바로 뒤에 자리 잡은 포장마차에서 구운 오징어를 한 마리 사서 가등청정 오징어라 이름을 붙이고 서로 나눠서 씹어 먹었다. 너무 많은 명소를 전전하다보니 교토로 돌아갈 시간이 촉박해졌다. 교토 행 신칸센 특급열차에 몸을 실은 때는 땅거미가 내려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에 도착한 이래 줄곧 김선호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벚꽃 명소를 찾아다니느라 매일 하루 8시간이상을 전철, 지하철, 버스, 등을 갈아타며 도보로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앞장서 걷는 김선호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뒤 쫒아가는 우리들이 그를 놓칠 새라 가끔 애를 먹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번개 불에 콩 튀기기처럼 빠르게 움직인다는 뜻에서 히까리 센세이(빛 선생)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교토 역에 도착한 때는 밤 10시 반쯤 되었다. 11시 교토 역을 출발하는 막차를 타기위해 들고 뛰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날 밤 잠자리로 예약된 별장에 전화를 거는데 이미 퇴근을 해버렸는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갑자기 집 없는 천사 신세가 되어버렸다. 히까리 센세이가 잠자리를 알아보러 간 사이에 우리는 막차가 곧 출발한다는 방송을 들으며 전철입구에 서성거리고 있는데, 멀쩡하게 생긴 남자들이 하나 둘씩 우리가 서있는 전철입구로 몰려들면서 우리들을 이상야릇한 눈초리로 째려보았다. 막차가 출발하자 전철입구 철문이 닫히고 그 자리가 아늑한 장소로 변했다. 알고 보니 그 곳에 진을 치고 주무시러 온 홈리스들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들이 우리를 왜 이상야릇한 눈초리로 쳐다봤는지 알아차렸다. 그들이 우리들을 자기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온 사람들로 생각했을 법했다. 기다리던 히까리 센세이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우리는 함께 역사를 빠져 어두워진 길거리로 걸어 나왔다. 사우나에서 잘 생각이었다. 벌써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어 블럭 걸어가니 사우나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아뿔싸 Men Only라는 싸인이 붙어있었다. 우리는 더욱 황당해졌는데 길 맞은편에 Dormy Inn이라는 호텔이 눈에 띄었다. 가서 알아보니 다행히 우리를 맞아줄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뻤다. 방에 들어가니 내부 장식이 일본식으로 참 고상하게 꾸며져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호텔 옆 24시간 Family Mart에 가서 사발우동과 몇 가지 안주를 사가지고 와서 요기를 하고 천정이 뚫려 밤하늘이 보이는 옥상에 설치된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잠을 청했다. 새벽 2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4월 3일 화요일 - 철학의 길, 기온의 이시베고지 골목길, 네네의 길, 니시끼 시장
아침 일찍 체크아웃하고 봇짐을 메고 나서는데 궂은 봄비가 구질구질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앉아서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어제 밤 너무 늦게 도착해서 자세히 볼 수 없었던 교토 역 안으로 들어가서 관광안내소에서 벚꽂 명소에 대해 문의도 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역 내부를 돌아보았다. 역 안은 어제 늦은 밤과 달리 활기차게 오가는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히까리 센세이가 인도하는 대로 버스를 타고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공짜 우산을 각자 쓰고 철학의 길, 돌 담으로 연결되고 돌로 포장된 한적하고 멋있는 기온의 이시베고지 골목길, 네네의 길, 등을 산책하였다. 좁지만 깨끗한 골목길들, 다닥다닥 붙은 단아한 주택들, 요소에 보기 좋게 놓아둔 화분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벚나무들은 꽃망울을 인색하게 움켜쥐고 있는데도 관광객들은 이곳저곳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후 1시경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고 눈요기를 위해서 교토의 부엌이라는 니시끼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장 통로는 덮개지붕이 있어서 비가와도 꺼떡 없었다. 시장 통로를 가로 지르는 좁은 길들은 자동차, 자전거, 사람들이 함께 지나다녔다. 우리는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 통로의 한 식당에서 따끈한 우동과 스시를 시켜먹었다. 그리고 저녁 때 먹으려고 시장 통로 좌우에 즐비한 생선가게에서 여러 가지 사시미를 사가지고 니시끼 시장을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오늘 밤부터 3박 4일간 묵게 될 도큐 호텔로 가기위해서 교토 역으로 돌아왔다. 호텔 셔틀버스는 교토 역 남쪽 입구에서 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토 역 안에서 전철과 지하철 연결통로를 이용해서 층계를 오르내리며 남쪽 입구로 빠져나와 호텔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이러는 동안 한바탕 회오리 폭우가 쏟아져 여기저기 물이 고이고, 간판이 떨어져 나간 데도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저녁 TV 뉴스에 그 피해상황이 방영되었다. 토네이도의 일종이었다는 것. 기다리던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20여분 걸려 도큐호텔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이틀 전 히메지의 호텔에서 택배로 부친 여행가방이 우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체크인하고 각방으로 들어가니 일류호텔이지만 역시 방은 작고 옹색하였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한 방에 모여 낮에 니시끼 시장에서 사온 사시미와 함께, 사발우동으로 저녁을 때웠다. 저녁 해가 지면서 날씨가 맑아졌는데 모두들 지쳐서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서 우리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4월 4일 수요일 - 교토 고쇼, 금각사, 미야코 오토리 연극, 시라카와 도리, 본토죠
아침 8시 우리는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구름이 끼여 잔뜩 찌뿌린 하늘에 날씨가 쌀랑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도쿄로 옮겨가기 전 천황이 거처했던 교토 고쇼를 찾아갔다. 지하철 입구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여유롭게 구 천황거처로 관람하러 들어갔다. 이 교토 고쇼는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일 년에 두 번을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벚꽃이 만발하는 봄에 시간을 맞춰 찾아왔던 것이다. 식물원 쪽으로 돌아 들어가는데 벚꽃이 만개하여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교토지역에서 처음 본 벚꽃이었다. 벚꽃의 종류가 수십 가지가 있다나. 히카리 센세이는 벚꽃에도 조예가 있었다. 벚꽃은 고목의 몸통에서도 넓은 가슴에 브로치를 달아놓은 것처럼 잎사귀도 없이 피는 것이 신기하다.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며 옛 천황이 살던 넓은 정원과 큰 집들을 돌아보며 사진들을 찍어댔다. 정원, 분재, 연못, 다리, 등등 전형적 일본식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오후에는 차츰 구름사이로 해가 가끔 얼굴을 내밀곤 하였다. 우리는 교토 고쇼 관람을 마치고 금각사로 이동하여 오후 한 때를 인파속에 묻혀 지냈다. 금각사는 연못 한 가운데 금빛으로 칠한 절이 서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배가 촐촐하여 컵라면을 자판기에서 꺼내 들고 있는데 중국 사람처럼 보이는 남자가 우리 곁에 다가와서 한국말로 이 자리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 남자와 부인이 우리 옆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들도 우리가 먹는 라면을 사먹으면서 우리와 대화하게 되었다. 그분들은 뉴욕 플러싱에서 살다가 자녀들을 따라 한국으로 들어가서 살고 있는데, 며칠간 관광하러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였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뉴욕 동포라 매우 반가웠다.
우리는 오후 4시경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미야코 오토리라는 연극을 관람하러 택시를 잡아타고 기온의 이시베 고지(골목길)에 있는 극장으로 갔다. 일본에서는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하고 운전석은 오른쪽에 붙어있었다. 그래서 마주 오는 차와 부딪칠 것 같은데 잘들 피해 다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천황이 교토를 버리고 도쿄로 천도한 사실을 서로 사모하는 두 연인의 관계로 설정하여 서로 그리워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약 1시간정도의 연극이었다. 님은 우리를 버리고 떠났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자부심을 가지고 더 열심히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연극이었다. 연극관람이 끝나자 우리는 걸어서 시라카와 도리로 진입하였다. 땅거미가 내리고 여기저기 불빛들이 차츰 환히 밤거리를 밝힐 제 우리는 조명에 비추이는 시라카와 개울물로 절하듯이 엎어져 늘어진 밤 벚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즐기며 물밀 듯 오가는 인파속을 걸었다. 매우 넓은 가모가와라고 불리는 개천 맞은편의 뒷골목으로 수 백 미터 뻗어있는 본토죠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다카세가와라고 불리는 개울물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가 길 끄트머리에서 오른쪽으로 유턴하여 다시 북쪽으로 뻗은 두 세 사람이 함께 걸으면 꽉 차는 좁은 골목길을 걸을 제 자기 식당에 들어오라고 바람 잡는 호객 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우리는 200가지 일본 술이 있다고 선전하는 술집에 호기심이 끌려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들어서니 과연 수백 가지 사케 됫병이 전시되어있고, 사시미, 스시, 우동, 등 음식도 호화로운 반면 값은 저렴한 편이었다. 식단표 위에 작은 글씨로 이 식당에서 제공하는 생선은 일본해(우리 나라 동해)에서 잡은 것이라는 말이 새겨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피폭을 의식하고 있다는 표지였다. 일본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담배피우는 것이 허용되었고 열차에는 담배피우는 방이 따로 있었다. 이 식당에도 담배피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떼기시장 같이 시끄러운 이 식당에서 우리는 음식과 사케를 맘껏 즐겼다. 호텔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4월 5일 목요일 - 아라시야마 공원, 게이샤의 메모리, 고베 슈쿠가와 공원, 니시끼 시장
히까리 센세이는 가는 곳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볼만큼 봤는데도 아직 벚꽃에 미련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의 이번 일본관광여행은 벚꽃이 주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이끄는 대로 아라시야마 공원에 갔으나 이곳 벚나무들은 아직 꽃망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터지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벚나무들을 한탄하며 우리를 이끌고 다음 명소로 갈 전차를 타러갔다. 영화 “게이샤의 메모리”에 나온다는 천본 도리를 보러 후시미 이나리 신사로 갔다. 일본에는 곳곳에 갖가지 귀신을 모시는 신사가 무수히 많은데 이 신사는 돈을 벌어준다는 쌀 귀신을 모시는 곳이었다. 이 신사 방명록에 천황가족들도 돈을 헌납했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 신사는 돈 을 많이 낸 사람은 큰 주황색 솟대를 만들어 세워주고 조금 낸 사람은 비례적으로 작은 솟대를 만들어 세워주고, 그 솟대들을 줄줄이 세워 통로를 만들고 관광객들이 그 통로를 구경하러 오는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그냥 놔두는 법이 없는 히카리 센세이는 이곳을 빠져 나오자 우리를 이끌고 일본 100대 벚꽃명소 가운데 하나인 고베의 슈큐가와 공원으로 가는 전철역으로 갔다. 이 공원은 벚꽃이 제법 피어 깨끗이 흐르는 개울물 둑 아래로 엎어지듯 늘어진 벚나무가지들에 벚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개울물 둑 위에는 대학생들이 그룹지어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 노는 모습이 보였다. 사께 됫병, 아사히 생맥주 깡통, 등이 보였다. 일본에서는 학생들이 공원에 모여서 술을 마셔도 되는가 보다. 4월 1일에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4월 초순에 신입생 환영회를 하는 거란다. 젊음은 아름답다! 교토 시로 다시 돌아와 들어설 때 저녁 6시경이었다. 매일 8시간 이상 지하철과 전철을 오르내리며 여러 명소를 찾아 걷기를 하는데 발바닥이 후끈거리고 허기가 졌다. 우리는 교토의 부엌이라는 니시끼 시장에서 사시미를 사먹기로 하고 니시끼 시장으로 서둘러 갔으나 저녁 6시 이후 파장이 되어 점포들이 거의 문을 닫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터벅터벅 시장통로를 지나 길 건너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10%할인 쿠폰을 들고 호객하는 젊은 아가씨(알바 학생같이 보임)가 우리 앞을 가로 막았다. 청순한 모습에 세일즈먼 쉽이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음식 내용과 가격이 적힌 메뉴를 보니 괜찮아보였다. 우리는 그 아가씨의 안내로 식당이 있는 2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올라갔다. 맛있고 푸짐한 저녁식사로 우리는 교토의 마지막 밤을 장식하였다. 늦은 밤 호텔로 돌아와 다음날 도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잠을 청했다.
4월 6일 금요일 - 와타쿠라 분수공원, 쯔끼지 수산시장, 신쥬꾸 도쿄 도청 전망대, 야스쿠니 신사, 치도리가후치 공원
아침 일찍 3박4일 동안 체류했던 교토의 도큐호텔에서 체크아웃하며 여행가방을 일본을 떠나기 전 마지막 행선지가 될 오사카의 난바호텔로 택배로 부치고, 교토 역에서 도쿄로 가는 신칸센 특급열차에 올랐다. 오전 11시경 도쿄의 천황거소가 마주 보이는 와타쿠라 분수공원에서 뉴욕에서 살다간 현재 일본 요코하마에 거주하고 있는 수미엄마를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2시간 30분정도 걸렸을까? 도쿄 역 도착시간이 오전10시 40분경. 도쿄 역을 빠져나와 분주한 시가지를 걸어서 와타쿠라 분수공원으로 갔다. 그녀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 땅에서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천황 거소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쯔끼지 수산시장 안에 있는 유명한 다이와 라고 불리는 스시 집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 유명 스시집 앞은 수십 명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시 몇 점 얻어먹자고 필사적이었다. 우리도 꽁무니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40분이 지나서야 우리 차례가 돌아 왔다. 우리가 거의 맨 마지막 손님이었다. 우리 다음 손님을 한 순배 받고 오후 1시가 지나자 그 스시 집은 문을 닫는 것이었다. 이곳 스시 집들은 수산시장이 문을 여는 새벽 6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영업을 한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유명하다는 이 쯔끼지 시장의 맛있는 스시 맛도 못 볼 번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신쥬꾸 도쿄 도청 전망대에 올라가서 사방으로 내다보이는 광범위한 도쿄시를 관망하였다. 후지 산은 구름이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우리는 건듯하면 일본 수상이 참배한다고 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사찰하였다. 많은 장사치들이 호객행위를 하였지만 우리는 이곳에다 한 푼도 보태줄 마음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야스쿠니 신사 맞은편에 위치한 치도리가후치 공원으로 육교를 통해 들어갔다. 역시 벚꽃은 물과 성벽 또는 낭떠러지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만개한 벚꽃이 낭떠러지 위에서 강물 위로 휘영청 늘어져 있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우리는 발 디딜 틈 없이 교차하는 인파에 떠밀려 걸었다. 강물위에 젊은 청춘남녀들이 조각배를 타고 노니는 모습은 낭만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공원의 끝에 이르러 지하철 입구로 가는 길모퉁이에 사꾸라 수산이라고 불리는 체인 식당이 눈에 띄었다. 날씨도 차갑고 발바닥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우리는 그 식당에 들어가서 스시, 사시미, 우동, 사께, 등 맘껏 먹고 마셨다. 저녁 7시가 지나자 주위가 컴컴해졌다. 우리는 지하철 속에서 수미엄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오늘 밤을 지낼 끓는 바다라는 뜻의 아타미로 가는 신칸센 열차에 올랐다. 1시간 이상 걸려서 아타미 역에 도착, 택시를 타고 우리가 묵을 호텔에 도착한 때는 밤 10시가 지났다. 주위는 컴컴한데 무엇인가 여행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네온싸인들이 반짝이는 해안선이 보였다. 우리는 방을 배정받고, 노천은 아니지만 바다가 내다보이는 호텔의 온천탕에서 목욕을 하고 한 방에 모여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밖에 저 멀리서 깜박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면세점에서 사온 쟈니 블루를 따라 마셨다. Salute!
4월 7일 토요일 - 끓는 바다 아타미, 아지 활어회, 미시마, 하코네, 오와쿠다니, 우에노 공원, 아메요코 시장
아침 일찍 호텔의 온천탕에서 한 번 더 목욕을 하고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호텔 식당에서 지금까지 가장 비싼 일본 정식 아침식사를 즐겼다. 끝에 아지 활어회를 시켜서 시식을 했다. 우리 식성으로는 몇 마리를 먹어도 부족 할 텐데 일본사람들은 아주 적은 분량으로 진미를 음미하는 것 같다. 밑반찬도 남으면 버릴망정 푸짐하게 주는 우리식처럼 가지 수도 많지 않고, 깔끔하고, 시각적으로 모양새가 좋은 것이 일본음식의 특징인 것 같다. 냅킨도 홑겹에 그 크기가 손 바닥만해서 처음에는 좀 옹색한 느낌을 가졌지만, 하루하루 날짜가 지남에 따라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근검절약은 그들의 삶속에 배어있었다. 일본식 정원도 그렇고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려면 한 사람이 큰집을 지을 수가 없을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닐까? 집들도 올망졸망 작고 길들도 비좁지만 있을 것은 다 있고 질서정연하고 길거리는 휴지조각, 담배꽁초를 볼 수 없다. 버스건 열차건 정류장에는 나라비(줄) 서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새치기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길거리에 즐비하게 세워진 자전거들도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뉴욕에서 같으면 자물쇠를 채우건 채우지 않았건 순식간에 없어질 텐데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자기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않는다는 도덕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본은 그런 치사한 좀도둑이 없는 사회라고 봐야 옳은 것 같다. 절제된 행동으로 남을 배려하는 신중성이 있고, 절대 크게 떠들지 않고, 스미마생, 도오모, 아리가또가 입에 붙어있고, 열차 안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승무원들과 판매원들의 모습에서 뭔가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작고 허술한 집들도 그 앞에 또는 창문에 깜찍하게 피어있는 화분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일본사람들은 인생의 운치를 아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에 공짜로 인터넷을 할 수 있도록 아래층에 컴퓨터가 놓여있었다. 아침식사 후 선 비치(Sun Beach)라는 아타미 해변을 산책하는 데 이 해변에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의 오리지날 일본 소설 금색야차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발로 차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주제는 유치하지만 재미있는 조각상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오랜만에 이메일을 체크하고 미국신문, 한국신문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곧 바로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우리는 걸어서 아타미 긴자(중심가)를 돌아보고, 열차를 타고 미시마에 가서 구름에 가린 눈에 살짝 덮인 후지 산의 허리부분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오다와라를 거쳐 하코네로 발걸음을 옮겨, 등산철도와 케이블카, 로우프 웨이, 등을 바꿔 타며 화산증기가 분출하는 오와쿠다니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일본에서 가장 높다는 산, 후지 산은 오와쿠다니 전망대에서도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았다. 후지 산은 끝내 멀리서 찾아온 우리들에게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내려오는데 날씨가 차갑더니 차창 밖으로 갑자기 눈발이 휘날렸다. 이 전차 안에서 히카리 센세이는 유학생으로 뉴욕에 있을 때 플러싱 키세나 불르바드에서 살았다는 어린애를 안은 젊은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신칸센 열차를 타고 다시 도쿄 역으로 돌아갔다. 날씨는 차갑고 쌀쌀한데 히카리 센세이는 도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한 번 더 벚꽃을 보여주려고 우리를 우에노 공원으로 끌고 갔다. 해는 서산에 지고 땅거미가 엄습해 오는데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우에노 공원의 밤 벚꽃놀이는 그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회사 신입사원들, 대학 신입생들이 길가에 멍석을 쭉 깔아놓고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그들의 청춘을 노래하는 파티를 열고 있었다. 예약된 열차시간이 촉박하여 우리는 앉아서 여유를 부리며 식사할 시간이 없었다. 히카리 센세이는 우리 동포들이 장사해서 돈을 벌었다는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은 아메요꼬 시장으로 우리를 끌고 갔다. 이 시장도 난장판같이 오가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생선회를 엄청 싸게 파는 점포에서 저녁 꺼리를 사가지고 황급히 7시 20분 오사카로 떠나는 신칸센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3시간 정도 지난 후 오사카에 역에 도착하여 난바호텔을 찾아 들어가니 밤 11시가 지났다. 도쿄 아메요꼬 시장에서 사온 사시미와 사발우동으로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히카리 센세이의 강행군에 이길 사람이 없었다.
4월 8일 일요일 - 풍신수길 꽃놀이 행렬, 오사카 쯔루하시의 동포 고기구이 집
연일 하루에 8시간 이상씩 볼거리를 찾아다느라 지하철과 전철역을 오르내리며, 때때로 열차시간에 맞춰 플랫폼에 도착하기 위해 뛰기도 하며 걷는 분량이 산행으로 치면 다서 여섯 시간의 등산하이킹에 비길만하였다. 우리는 5년 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1주에 한번 등산하이킹을 해왔는데, 일본에 와서는 매일 등산하이킹을 한 셈이었다. 나는 발바닥이 아프고 왼발 께끼 발가락의 끄트머리가 물러 벗겨졌다. 우리 히카리 센세이도 발가락에 물집이 생겼다고 고백을 하였다. 히카리 센세이의 각본에 따라 정신없이 쫒아 다닌 일본관광도 마지막 날이 성큼 다가왔다. 우리가 일본에 도착한 이래 가장 화창한 날씨였다. 일요일 아침인데도 젊은이들이 모이는 카페 같은 곳에서는 요란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사카 주방용 도구상점 거리를 구경한 후 교토 다이고 절에서 풍신수길 벚꽃놀이 행렬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히카리 센세이의 뒤를 따라 우리는 지하철과 전철을 번갈아 갈아타며 교토의 다이고 절을 찾아갔다. 풍신수길 벚꽃놀이 행렬은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하는 모양이었다. 전철역에서 내려 다이고 절로 올라가는데 오전 행렬을 보고 내려오는 인파와 올라가는 인파가 서로 교차하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오후 2시경이었는데 마침 오후 행렬이 시작 되었다. 히카리 센세이와 나는 4홉 짜리 사케를 한 병 사가지고 수길이 궁중신하들을 앞뒤로 세워 거느리고 커다란 붉은 양산이 세워진 일본식 큰 가마를 타고 행차하는 길가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플라스틱 고푸에 사케를 따라 마시며 역사이야기를 나눴다. 수길이는 임진왜란으로 우리를 괴롭힌 놈이지만 일본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영웅이었다.
오후 늦게 해질 무렵 오사카로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의 쯔루하시의 동포 고기구이 집에 들러서 저녁을 들었다. 어디를 가나 일본사람들이 하는 식당들은 깨끗한데,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사는 이곳은 왠지 모르게 지저분하고 장사가 망해서 문 닫은 가게도 눈에 띄었다. 우리 호텔로 돌아오는데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양 마음이 언짢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돌아와서 어제 도쿄를 떠나면서 아메요꼬 시장에서 사온 먹다 남은 사시미와 방금 들어오면서 사온 사케를 나눠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4월 9일 월요일 - 국민적 각성
이제 익숙해진 구로몬 시장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지난번 갔던 실비식당에 가서 아침을 간단히 들고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하고 여행가방을 끌고 오사카 난바 역으로 갔다. 간사이 공항까지 약 40분이 걸리는데 3분 후에 출발하는 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플래트 폼으로 들고 뛰었다. 아슬아슬하게 타자마자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수속 및 출국수속을 거쳐서 오후 12시 50분 발 뉴욕 행 챠이나 에어라인 탑승게이트까지 갔다. 우리를 태운 보잉 747 점보비행기는 정시에 간사이 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눈을 감고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간 지난 열흘간의 일본 관광여행에서 내 눈으로 본 정경들을 영화를 상영하듯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일어에 한자가 많이 섞여있어서 써놓은 간판을 보면 대충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발음을 할 수 없으니 밑에 써놓은 영어식 표기에 의존하는데 우리가 찾아다닌 그 많은 지명을 다 기억하기란 불가능했다. 애초에 히카리 센세이가 없었다면 우리가 일본여행을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우리가 가르쳐준 놈들, 그러나 못난 조선의 위정자들로 인하여 우리 땅을 유린하고 우리 민족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준 놈들, 국교정상화 이래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일삼는 놈들 이었기에 일본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깝고도 먼 나라로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길은 가까운 이웃으로 사귀되 그들의 좋은 점은 배워서 우리 것으로 만들고 모든 분야에서 그들을 능가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 때 한 번 호되게 당했으면 조선이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그런데 집단 이기주의, 무사안일, 개인의 부귀영화, 그리고 오로지 당리당략으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던 위정자들, 끊임없는 중상모략으로 반대파 죽이기와 염생이같은 불쌍한 백성을 쥐어짜먹기만 하던 조선의 위정자들....결국 나라를 행랑 머슴 같은 일본에게 갖다 바치지 않았던가?...무엇이 국익인가?....
오늘날 한국의 정치를 보면 위정자들만은 그때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한국의 위정자들에게서 변전하는 국제정세를 올바로 이해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과 한민족의 번영에 유리한지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위정자들은 늘 그렇다. 그러나 이제 무식한 백성을 기만하고 외세에 국익을 팔아 기득권을 유지하고, 그 권력으로 백성을 짜먹던 시대는 지났다. 위정자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는 마당에서는 국민적 각성만이 궁극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 일본에 대한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것이다.
항시 열정적이시며 저의 본보기가 됩니다
ReplyDelete이번 여행기는 마치 같이 앉아 독한 위스키 한잔하는것 같은 느낌이듭니다 주말 하이킹 하시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