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옛친구들과의 여행 2006
고국 방문기 2006년 5월
평화통일 자문회의
뉴욕 협의회 위원 김 성 준
1. 망설임
약 한달 전, 미주지역 협의회 자문위원들의 전체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번에 간다면, 2003년 11기 평통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3번째 회의참석을 위한 고국 방문이 되는 셈이었다. 해외동포 및 국내 위원들이 모두 참석하는 11기 총회가 2003년 가을에 열렸을 때 나는 19년만에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여 말로만 듣던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우리들이 해외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피 땀흘리던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은 압축경제성장과 민주화라고 하는 대 역사를 이룩하고 있었다. 2004년 가을 1년만에 해외지역 협의회 자문위원들의 전체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금강산 1일 관광이 일정에 포함되어있어서 북한 땅을 밟아본다는 호기심이 회의 참석에 상당한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이번 미주지역 전체회의에는 신라시대의 고도 경주와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 현대의 자동차 및 중공업 단지 관광이 꼬리에 붙어있었다. 이번 회의는 새로 임명된 12기 협의회 자문위원들의 연수를 위해 마련된 회의였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남쪽의 관광지보다는 통일시대의 상징 개성공단이 포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바라던 소식은 끝내 들리지 않았다. 2박3일의 짧은 회의를 참석하기 위해 최소한 1주일이상의 일상생활을 접고, 온몸이 경직되고 뒤틀리는 장시간의 비행기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망설여졌다. 고민이 계속되었다.
2. 떠남
2005년 7월1일 12기가 시작된 이래 벌써 10개월이 지나가는데, 내가 속한 분과의 위원들조차도 다 알고 지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래가지고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중에 팀웍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서로 알아야 팀웍이 가능하다. 회의 참석은 서로 사귈 수 있는 기회다. 생각이 이쯤 이르렀을 때 간다는 결심이 서게되었다.
그야말로 두려워하던 15시간의 비행 끝에 우리를 태운 아시아나 항공기가 자랑스러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4월 30일 일요일 새벽 4시경이었다. 일산에 사는 처남이 마중 나온다는 시간은 5시 반이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하여 1시간 반을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다. 함께 도착한 다른 동료들도 갈 데가 없어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각자 끌고 온 큰 여행가방을 지키며 공항 대합실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자 처남내외가 나를 데리러 왔다. 처남이 모는 차는 계기 판 위에 속도제한을 미리 알려주는 장난감 같은 장치가 붙어있었다. 아주 예의바른 여자의 목소리가 “전방에 속도제한 표지가 있습니다. 속도를 줄이십시오.”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그래도 계속 달리니까, “속도를 줄이십시오. 속도를 줄이세요, 속도를 줄이세요, 속도를 줄이세요!” 하고 속도를 제한속도 이하로 줄일 때까지 그 여자 목소리가 소리를 질러댔다. 이 장치가 제한속도 위반을 막아준다고 한다. 재미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경찰의 제한속도 위반을 감지하는 레이다를 감지하는 장치를 다는 것이 위법인데, 한국에서는 제한속도를 미리 감지하는 장치를 허용하는 것이 대조가 되었다. 나는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의 제도가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위반을 잡는 것보다는 속도위반을 저지하여 과속으로 인한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산에 도착하자 동네 해장국집에 들러 아침부터(미국시간으로는 저녁) 한 잔 걸치고 처남 집에 짐을 내려놓았다. 오전 11시에 근처에 있는 후곡성당 에서 미사참례를 하고 나오니, 바로 길 건너편에 수산식당이 눈에 띠었다. 마침 점심때라 수족관에서 헤엄치고 있는 여러 가지 생선, 해삼, 멍게, 게불, 등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거나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처남과 함께 일산 호수공원을 걸어 돌아다니면서 오후시간을 보냈다. 밤에 청계천 구경을 가기로 했는데, 저녁때가 되자 너무 피곤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5월 1일 월요일, 아침 9시경 짐을 챙겨들고 처남 집을 나와 일산 주엽 정거장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쉐라톤 워커 힐 호텔. 가는 길에 청계천 구경과 30년 동안 만나지 못한 오금동에 사는 사촌 여동생을 만날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계천은 종로 3가 정거장에서 내리면 가볼 수 있는 곳이고, 오금동은 워커 힐 근처 강남지역으로 종로 3가 정거장에서 갈아 탈 수 있는 지하철 5호선이 닿는 곳이었다. 종로 3가 정거장에 도착했는데, 최소한 간편하게 들고 온 짐이었지만 거추장스러워서 청계천 구경을 위해 지하철 밖으로 나설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지하철 5호선으로 갈아타고 오금동으로 향하였다. 사촌 여동생은 점심식사를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결혼한 큰딸이 신랑과 함께 친정을 방문중이었다. 큰딸은 경제학을 공부했고, 신랑은 생물학 박사로 미국 보스톤 하바드 대학에서 줄기세포를 연구한다는데, 이 애들의 존재를 알게되기까지 30년이 지난 것이다. 결혼할 때 25세였던 이 사촌 여동생이 2녀 1남의 어머니로 57세가 되었다는 말이 내 가슴속에 격세지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이 애들의 관심거리였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오후 5시가 다가왔다. 이 애들과 이메일 주소를 서로 주고받으며 작별인사를 하고, 동생이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싣고 등록마감 시간이 약간 지나 워커 힐 호텔에 도착하였다.
3. 공식 일정
이 번 미주지역 자문위원 회의의 초청대상은 미국, 카나다 및 중남미에 퍼져있는 12개 협의회에 소속된 891명의 위원들인데, 이 중 600여명이 참석함으로서 참가율이 67%이상 되었다. 공식일정은 5월 1일 월요일 저녁 국회의장 만찬으로 시작되었고, 5월 2일에는 3개의 강연, 5월 3일에는 2개의 강연과 대통령 면담으로 막을 내렸다. 이 번 미주지역회의는 일련의 강연을 통해서 참가한 자문위원들이 통일시대를 열어 가는 여정에서 함께 가는 “도반”으로서 각자의 사명과 역할을 자각하고,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도록 계획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5월 3일 오전, 평가와 건의 시간에 발표된 여러분들의 의견개진가운데, 특히 미국에서 온 몇 분의 자문위원들이 자기들이 일상 접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정치인들에게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하는가에 대한 지침서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이 번 연수회의가 참가자들이 이런 생각에 이르도록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는데 효과가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야 말로 우리 자문위원들이 미국에서 우리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에게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가를 주지시키는 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3월 16일, 플러싱 코리아 플라자에서 열린 뉴욕 뉴져지 유권자센타 10주년 기념만찬에서 주제연설을 한 유대인 로젠버그 씨(Director of Policy Analysis for Israel Policy Forum)가 지적한 대로, 한인들의 미국 내에서 정치력 신장을 위한 운동이, 투표하고 어느 특정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대는 수준을 뛰어넘어 이제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번영을 위해서 미국이 무엇을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가를 분명히 전달하는 통로와 기술을 개발하는 수준에 올라가야 한다는 자각이 필요한 시점에 다 달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도 2차 대전 때까지는 600만 명의 동족이 살상을 당하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의식이 미처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서서히 새로 탄생한 조국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미국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력 신장의 단계로 발전했다는 로젠버그 씨의 이야기는, 미국에 사는 우리 한인들이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 닮아가야 할 모델로서 귀담아 들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한인사회도 이제는 우리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서 미국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가 왔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는 웅변에 가까웠다.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우리 나라가 처한 현실을 분명히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담화 가운데, 한미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힘이 없을 때 미국에 기대서 지난 50년 동안 신세를 많이 졌다. 미국의 지난날의 도움에 감사한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우리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되었으니, 독자적으로 살면서 다정한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기대는 것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은 다르다.”라는 뜻의 말을 했는데, 다음날 주요 신문에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말을 제목으로 뽑아서 마치 대통령이 한 말이 반미적인 것처럼 왜곡보도 되었다. 반미=친북=좌파 라는 상투적 등식으로 대통령을 미워하는 보수신문들이 언어의 장난을 일삼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런 신문만 읽고 있고, 이런 신문을 읽는 국민들이 그렇게 믿도록 세뇌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속담에 "You become what you eat."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You become what you read."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 아닌가?.... 국민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는 데 언론매체와 그 역할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가 자문위원들의 진지한 호응과 열기로 좀 길어진 대통령의 담화가 끝나자 문화탐방 및 산업시설 견학을 선택한 500여명의 위원들과 그 동반가족들은 10여대의 버스에 편승하여 경주로 출발하였다. 그 때 시간이 오후 4시경이었다.
경주 코오롱 호텔에 도착한 때가 5월 3일 저녁 9시 반경. 경남도지사가 베푼 만찬을 들고 잠자리에 들 때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년고도 경주의 밤은 고요하였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걸음을 멈추어라...” 어디선가 듣던 노래 가락이 내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였다. 꿈을 꾸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불국사 주지스님이 베푼 조찬을 들고, 우리는 불국사로 향하였다. 불국사는 나로서 3번째 방문이었다. 중3 수학여행 때(1961),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때(1984), 그리고 이번이 3번째 방문이었다. 오전 11시쯤 현대 자동차와 조선소로 향하였다. 오비이락인가? 마침 현대 자동차 회장이 구속되어 수사를 받고 있는데, 미주동포들이 그 회사를 방문하게 된 것이 마치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처럼 시간이 맞아 떨어졌다. 이 곳은 나로서 2번째 방문이었다. 첫 번째는 1984년도에 천주교 200주년 기념대회 때 해외동포들에게 판문점과 산업시설 관광의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 때는 포항제철공장도 볼 수 있었다. 안내양의 설명을 들으며, 현대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를 둘러보면서 대~한민국!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만남
현대 조선소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향한 때가 5월 4일 오후 3시 반쯤이었다. 이제부터 뉴욕에 돌아갈 때까지 자유다. 그 날 밤, 뉴욕에서 온 친구(박 선배)의 도움으로 서울 역삼동 차병원 사거리에 있는 휴먼터치빌에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면 나를 반겨줄 몇 안 되는 친구들을 그 곳에 집합시켰다. 대전의 이 교수는 내가 대전에 내려오지 않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내가 최근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여행계획을 세우고, 내가 대전에 내려가면 방방곡곡 나를 데리고 다니며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 대해 그의 해박한 지식으로 명쾌한 강의를 들려주곤 하였다. 그런데, 이 번에는 그 친구의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서서, 서울이나 그 근교에서 소일할 생각으로 나를 만나려거든 서울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또 한 친구는 대학 시절 3년 동안 하숙방을 같이 썼던 같은 학과 선배(조 선배)로서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어린 왕자”처럼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때 포항제철 창업역군의 한 사람으로 거물 박태준씨가 이끌던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소의 비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 한 친구(이 선생)는 이 사람의 고향 친구로서 대학 시절 종종 만나서 술을 마시며 사귄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내 결혼식 때 증인을 섰던 사람으로 내 이민 초기에 미국에 연수여행을 와서 내 좁은 아파트에서 보름정도 불편을 함께 겪었던 사람이다. 내 아내는 이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결혼식 때 증인을 섰던 사람,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흥행하던 “오 칼카타!”를 함께 보러 갔던 사람으로 기억하곤 한다.
무엇을 먹고 싶으냐가 친구들의 질문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고 싶다고 말하였다. 울산을 출발한 버스가 서울에 가까이 다가가자 교통체증으로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5월 5일은 금요일, 어린이 날,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등이 겹쳐서 사람들의 대 이동이 예상되는 연휴였다. 그래서 5월 4일 오후부터 차가 붐 빈다는 이야기였다. 친구들은 벌써 약속한 장소와 시간(7시 30분)에 도착하여 애를 태우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동 서울 터미널을 지나 저녁 9시쯤 되어 워커 힐 호텔에 간신히 도착하였다. 뉴욕에서 함께 온 동료들과 황급히 작별인사를 나누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역삼동 차병원 사거리로 향하였다. 교통체증이 매우 심하였다. 이 교수, 조 선배 그리고 이 선생과 함께 건배를 들 때 저녁 10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5. 동해 바다
조 선배는 다음 날(5월 5일 금요일) 아침 일찍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지로 알려진 강원도 산골에 ‘아리랑의 고장 정선’이라 불리는 곳에 아우라지 라는 동네가 있는 데, 그 곳에 산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교수와 나는 아침 일찍 조 선배와 합류하여 아우라지 라는 곳까지 함께 가서, 그 곳에서 조 선배와 그 일행이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에 그들이 남겨둘 자동차로 동해나 삼척을 갔다오기로 하였다. 불과 몇 시간 잤을까?... 아침 일찍 우리는 호텔을 빠져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한 장소, 청담동 경기고등학교 앞으로 갔다. 그 곳에서 조 선배와 그 일행(한 선생)을 만나서 한 선생이 몰고 온 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 때가 아침 7시 30분쯤 되었다. 우리 일행이 탄 길이 영동고속도로였는데, 이른 시간인데도 휴게소는 가는 곳마다 연휴를 즐기러 나선 자동차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두 세시간 달렸을까? 어제 밤의 숙취와 아침의 시장기를 달랠 겸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이라는 곳에서 잠시 빠져 나와 동네로 들어갔다. 그 동네에는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오가며 들리는 이름난 식당들이 골목골목에 있었는데, 우리는 해장국을 잘한다는 감미옥 이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해장국과 해장술이 뱃속에 들어가자 온몸이 따뜻해진 날씨에 눈이 녹아내리 듯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또다시 목적지인 아리랑의 고장 정선을 향해서 꾸불꾸불한 산길을 달렸다. 산길은 꾸불꾸불하지만, 모든 도로가 완벽하게 포장이 되어있어서 운전시간이 매우 단축되었다. 험한 산과 개울들은 잘 다스려지고 있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 나라가 이룩한 발전의 모습은 이 깊은 산 속에서도 뚜렷이 목격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한을 담은 노래 가락인데, 어찌해서 이 정선이라는 고장에서 아리랑이 발생했을까?... 그것을 설명하는 책자 같은 것이 언 듯 눈에 띠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추측만 하였다. 아마 그 옛날에는 오늘과 같이 잘 닦인 도로도 없고, 깊은 산 속에서 먹을거리도 부족하고, 눈이라도 내리면 꼼짝없이 추운 산 속에 갇혀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해야하는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이 맺힌 한을 노래한 것이 아니었을까?....
정오가 조금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 곳은 사람들이 자꾸 빠져나가서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어디든지 말뚝을 박고 집을 지으면, 그 땅이 자기 것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묵을 숙박업소(산수갑산)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아우라지 근처 구절리 라고 하는 곳, 개울과 산기슭에 자리잡은 여러 개의 방이 있는 통나무건물에 방을 잡아놓고, 조 선배와 한 선생은 산행을 떠나고 이 교수와 나는 동해로 향하였다. 동해까지 거리는 70킬로쯤 되는데 워낙 산길이 꾸불꾸불하기 때문에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려서 동해시에 도착하였다. 옛날에는 묵호 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동해시로 불린다는 이교수의 설명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묵호 항구 쪽으로 가는 길목에 해군 기지가 눈에 띠었다. 묵호 항구에 수산시장이 있었다. 이 수산시장에서 이 교수와 나는 금방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들과 멍게, 해삼, 등을 사서 먹고, 저녁 때 조 선배와 한 선생과 함께 먹을거리를 사들고,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오후 4시가 조금 지나서 다시 정선으로 향하였다. 이 교수는 운전하면서 간간이 한국의 정치, 경제, 현대 자동차 회장 구속, 최근 한일관계 및 한중관계,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6. 이 교수의 강의내용
한국의 정치와 경제는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고 있을 뿐 가야할 길을 잘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30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성장과 발전이라는 이야기였다.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경제가 불안하다는 이야기는 수구보수신문들의 악선전에 불과할 뿐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IMF 외환위기도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었지, 당시 경제문제를 책임지고 있던 강경식 부총리나 김인식 청와대 경제보좌관이나 대통령 YS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외환위기를 겪지 않고도 한국경제가 구조조정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변수를 고려해야만 한다.
한국은 유럽 국가들이 산업혁명이후 200여 년이라는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달성해냈고, 겪어내야 했고, 지불해야 했던 사회적 비용을 4-50년이라는 참으로 짧은 기간동안에 한꺼번에 다 이루어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 한국경제에 대해 날이면 날마다 비관적 전망과 비판적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 그런 기사를 쓰는지 반성해야만 할 일이다. 경제의 전개과정을 객관적 시각에서 또 역사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왜곡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모든 잘못된 부분을 현 정부의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또한 이런 신문을 열심히 읽는 국내 독자들은 한국경제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첫해부터 시작된 일로서 보수언론과 그 하수인들의 주장대로라면 한국경제는 진즉 결딴이 나 버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경제는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수출 성장률이 연간 20-30%씩 증가하면서 2005년에는 수출액이 3,000억불을 초과하였다. 물론 현 정부가 잘못하는 일도 많이 있다. 무릇 정도를 걷는 언론이라면, 모든 사안을 공정하게 잘잘못을 따져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는 것이 바른 자세라고 하겠다.
한국경제는 대략 5%내외의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데, 노무현 대통령 집권이후 3.5%-4%대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통계가 말해주는 노무현 정부의 경제 성적표다. 따라서 성장 잠재력을 충분히 달성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고유가나 원화의 가치상승 등 대외적 요인도 있고 구내시장에서의 소비둔화 등 내부적 요인도 있고 정책적 실패에 기인한 잘못도 있다. 이렇게 하나 하나 원인과 결과를 따져서 잘못된 것을 비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언론이나 식자층뿐만 아니라 술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서울역 광장의 노숙자 들까지도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노무현 대통령 욕을 해야만 뭔가를 아는 사람대접을 받는다. 반대로 노무현 정부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그 곳이 어느 곳이든 집중공격을 받고 뭘 모르는 무식한 사람 취급을 각오해야만 하는 현실이라는 이야기였다.
정경유착이 끊어진 이 시점에서 정치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이미 취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은 정치와 무관하게 작동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현대 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구속 수사도 한국 기업이 거쳐가야 할 과정이라는 이야기였다. 정경유착의 시대는 가고, 이제는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원리에 따라서 발전해 나가야 할 단계로 성숙해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업에서도 한 사람의 뛰어난 경영자가 독단하는 시대는 가고, 이제는 기업이 시스템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시대로 이행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따라서 북한을 자기 땅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미국의 대북 경제봉쇄 정책은 결과적으로 북한 경제를 중국에 더욱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다. 지금 북한은 모든 생필품은 물론 공산품과 건설자재, 중유 등 생존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을 망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북한에 정변이 발생했을 때 개입할 수 있는 군사적, 정치적 준비를 완벽하게 마련해놓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본 자위대는 4개 호위함대가 있는데, 1개 함대의 전투력이 우리 한국 전 해군 전투력과 맘먹는다는 이야기였다. 독도문제로 만일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한국 해군은 일본 함대에 의해서 3분내에 끝장이 난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가공할 만한 이야기였다. 어째서 그런가? ...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두 나라 사이에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육군은 별 중요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하면, 해전이 된다는 이야기다. 일본은 한반도를 감시하는 2개의 위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위성으로 한국군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어서 한국 해군이 진해항에서 전투준비를 하는 동안 3분 이내에 일본의 미사일과 전투기들이 때린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일본은 한반도 감시 위성을 1개 더 쏘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은 아직도 독자적 첩보위성이 없기 때문에 미군의 첩보에 의존하고 있어서 그런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독도분쟁이 재발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한번 붙어보자는 식의 감정을 앞세웠는데, 그러한 감정적 대응은 미숙한 행동이라는 이야기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경거망동하는 격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중하면서 와신상담해야지!...
현재 한국은 북한에 정변이 발생했을 때 동족으로서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북한과 한국은 전혀 별개의 국가로서 UN에 가입이 되어있고, 군사 작전 권은 미국이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허락 없이 한국군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연고권으로 당연히 개입할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남한은 국제적으로 북한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북한과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시급히 채택해야할 시점에 와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앞으로 6월에 예정된 DJ의 방북에 무게가 실려있고, 정상회담이 조속히 실현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이야기였다.
7. 정선 아리랑의 달 밤
우리 가 탄 자동차는 현대 자동차 스틱이어서 나는 운전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교수가 줄곧 운전을 하였다. 이야기하면서 꾸불꾸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정선에 돌아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우리는 모닥불을 지피고 계곡 사이로 뜬 둥근 달을 쳐다보면서, 우리가 묵을 통나무집 앞마당에 판을 벌였다. 조 선배와 한 선생이 산행에서 따온 두릅, 곰취, 당귀, 등 산나물과 묵호 수산시장에서 사온 생선회와 산수갑산 주인이 잡아온 토종닭이 우리들의 저녁거리였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술도 취하고 냉기가 온몸을 감돌았다. 정적이 깃 든 깊은 산 속에서 우리들은 세면을 하고 각자 잠을 청하였다. 새벽녘이었다. 갑자기 지붕을 북처럼 두들기는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비가 온종일 내린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산 속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찌감치 서울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8. 마지막 밤
줄기차게 억수로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이른 아침 우리는 정선을 뒤에 남겨둔 채 서울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올 때 들렀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의 감미옥에 들려서 해장국과 해장술로 간밤의 숙취를 달랬다. 조 선배는 평창군 도암면에 있는 유천식당이라는 곳에서 토종 막국수를 먹고 가야 이 곳에 온 보람이 있다며, 그 곳을 들르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또 빗 길을 뚫고 조 선배가 꼭 가봐야 된다는 유천식당을 찾아갔다. 유명한 사람들이 다녀간 표지가 천장과 벽에 다닥다닥 무수히 붙어있었다. 거기서 점심으로 토종 막국수를 한 그릇씩 시켜먹고 또다시 빗 길을 뚫고 영동고속도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비가 내리니 올 때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는 5월 4일 목요일 밤 만났던 이 선생이 준비하고 있었다. 옛정을 생각해서 기어코 자기 집에서 하룻밤이라도 묵어가라는 요청이었다. 이 선생은 산업은행 감사과에서 수십 년 일했고, 몇 년 전에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지만, 은퇴해서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 상현동에서 살고 있다.
비가 내리니 초저녁인데도 날이 어두웠다. 서울에 도착하자 이 교수는 대전으로 떠나고, 한 선생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한 선생은 처음 만난 분이었지만, 격의 없는 분이었다. 조 선배가 한국 산악회에서 사귄 사람으로 죽이 잘 맞아서 둘이서 함께 자주 산행을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저녁식사를 낼 이 선생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그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 곳은 분당으로 가는 길목의 숲 속에 위치한 밤나무골집 이라고 불리는 보신탕 전문 업소였다. 이 곳에서 처음으로 이 선생의 부인을 만나보게 되었고, 조 선배도 부인을 이곳에 오게 해서 두 부부와 내가 함께 음식을 즐기며 옛이야기 꽃을 피웠다. 밤이 깊어감에 조 선배부부와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이 선생 부부를 따라 그들이 사는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묶게 되었다. 70평 짜리 아파트인데, 30여 평 짜리 아파트에 비해 넓직하고, 미국에 있는 아파트에 비하면 참 잘 꾸며놓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 값은 서울 강남에 있는 아파트에 비하면 1/4도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시간을 보니 저녁 10시쯤 되었다. 뉴욕 시간으로 토요일 아침 9시쯤 되었다. 그래서 뉴욕으로 전화를 걸어서 집을 떠난 뒤 처음으로 아내의 밝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내는 골프 약속이 있어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모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5월 7일 일요일, 아침 이 선생과 나는 근처에 있는 수지성당에 가서 9:30분 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와 부인이 차려준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좀 쉬다가 오후 2시경 또 다시 근처의 순대전문 식당에 가서 점심을 들고 이 선생 부부의 진정 어린 배웅을 받으며 오후 4시경 인천공항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탑승수속과 출국수속을 밟을 때 그 동안 헤어져있던 뉴욕에서 함께 온 동료들의 얼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를 태운 뉴욕 행 아시아나 항공기는 저녁 8시 정각에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언제 다시 오게 되려나?... 친구들이여 안녕! 대한민국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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