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다녀와서 1984

출발(1984년 4월 30일 화요일)
 
얼마나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던가! 특히 아내는 4년 전 한 아이와 함께 다녀온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남편과 더불어 자랑스러운 세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간다는 기대에 들떠있었다. 나로서도 7년만의 방문인지라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탔던 대한항공 전세 비행기는 북미 동부지역의 각지에서 모인 교우들로써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엔진 소음과 어수선한 분위기가운데서도 동승한 신부님들의 강론이 줄곧 계속되었고, 앵커리지 공항 대합실에서는 고백성사를 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캄차카 반도 근처의 상공을 지날 때는 1983년 9월 22일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주도하는 미사가 거행되었다. 기상강론, 기상성찰, 공항 대합실에서의 고백성사, 그리고 기상미사와 영성체 등 좀체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설레고 술렁이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 한 마음 한 뜻을 이루고 있었다.
 
103위 시성식(1984년 5월 6일 일요일)
 
이날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100여만 인파중의 한 사람으로서 군중속의 한 사람으로서 목격한 장면은 나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아니할 감동적인 한편의 영화 같은 것이었다.
 
이날 해외교포들은 여의도 윤중 중학 교정에 아침 5시30분까지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장인과 장모는 시흥동 본당소속이었는데 벌서 3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나와 아내는 4시 30분쯤 아직도 캄캄한데 집을 나섰다. 한길로 나갔는데도 캄캄했고, 쏜살같이 지나다니는 화물트럭과 택시들의 명멸하는 불빛만이 눈에 띄었다. 가로등은 에너지 절약 시책으로 자정이 되면서부터 꺼져있었다. 버스는 아직 다니지 않는 것 같아서 우선 택시를 불러 타고 여의도 쪽으로 달려가는데,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흰 옷을 입고 하나둘씩 나오는 여신도들의 어렴풋한 모습들이 눈앞을 지나가는데 마치 숲속에서 요정들이 빠져 나오는 것 같은 아름다운 환영을 불러 일으켰다.
 
대방동 역전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경찰에 의해서 제지된 차량들이 몰리기 시작하고, 도보로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리도 하는 수 없이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날은 차츰 밝아오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열을 지어 여의도로 여의도로 몰려드는 우리 신자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의도 대교에 이르렀을 때 날은 훤히 밝고 여기저기서 대오 속에 끼어서 오는 뉴욕에서 같이 갔던 분들을 하나 둘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라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지휘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2열로 대오를 진 신도들의 무리들이 사방에서 여의도 광장으로 질서정연하게 몰려드는 장면은 전율을 느끼지 않고는 바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상공에서 이 장관을 목격한 어느 기자는 이것을 “민족의 대이동”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글을 썼는데 실감나는 표현이었다.
 
우리는 물도 마시지 않고 아침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단 광장에 들어가면 화장실에 갈수가 없을 거라는 추측에서였다. 또한 보안상 도시락은 물론 카메라, 만년필, 라디오, 등 아무것도 들고 들어가는 허용되지 아니하였다. 예정대로 5시30분경 윤중 중학 교정에 집결한 해외교포들은 거기서 일일이 이름과 소속을 확인한 후 비표를 받아 가슴에 달고 그룹을 지어 광장의 지정된 자리로 인도되어 갔다. 도중에 길이 인파로 혼잡을 이루었는데도 속속 제 갈 길로 빠져들 나갔다. 어떤 할아버지는 비표를 안 달고 들어가다가 경찰에게 적발되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냥 보내줘도 될 터인데 그 젊은 경찰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참 딱한 광경이었지만 쉴 새 없이 이동하는 인파에 밀려 우리의 대열도 광장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우리 자리에 찾아 갔을 때 이미 와있는 분들이 많았다. 교포들의 자리는 교황님을 쉽게 볼 수 있는 중앙에서 서쪽으로 한참 구석진 곳에 치우쳐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교포들의 자리를 중앙에 예정했으나 보안상의 이유로 변경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아무튼 교황님을 가까이에서 뵙고자 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셈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이 순간 이 공간을 점하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에 모두들 도취해 있는 듯하였다. 9시쯤 되었을까?... 해는 거의 중천에 가까이 떠있고 상층운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1981년 10월 18일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 대회 때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나는 기적이 발생했던 사실을 의식하면서, 오늘도 그러한 기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같은 것이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는데... 시간은 내 손목시계로 정확히 9시 26분이었다. 교황님이 광장에 도착하시기 직전이었다. 그때까지 군데군데 흩어져 있던 구름들이 서서히 광장으로 집결하여 거위 중천에 떠있는 해를 에워싸는 듯한 모양을 나타냈다. 그러자 해가 구름 사이를 통해서 서광처럼 광장을 내리 비추었다. 앞에 앉아있던 일본 수녀님 한분은 일어서서 “히까리 히까리!”하며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도 일어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웅성웅성하였다. 잠시 후 교황님께서 광장에 도착하셨다는 방송이 광장을 울려 퍼졌을 때 다시 모두들 잠잠해졌다.
 
교황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자 광장은 떠나갈 듯한 환성과 물결치는 깃발로 또다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교황님 만세! 비바 빠빠!....” 흰 옷을 입은 교황님의 모습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으나 나는 깃발을 흔들면서 목청이 터져라고 외쳤다. “교황님 만세! 비바 빠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 온 광장의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하고 있었다. 우리 마음은 모두 하나였다. 주님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예정대로 미사와 시성식은 거행되었다. 누구 한사람 잡담하는 이 없이 모두 진지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는가! 미사 전까지는 이기정 신부 , 그리고 미사 때는 장발 신부의 차분하고 낭낭한 목소리의 사회! 대합창단의 우렁찬 합창! 온정이 넘치는 교황님의 한국말 목소리! 우리에게 친숙한 약간 비음이 섞인 김수환 추기경님의 목소리!...우리는 초여름의 따가운 태양아래서 불편하게 콩크리트 바닥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속이 빈 것도 잠을 설친 것도 잊고 기가 막히게 혼연일체가 되어 이 역사적 광장의 현장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다.
 
이날 전국에서 모인 천 여 명의 신부님들은 하얀 제의 복을 차려입고 모두 높은 제단위의 교황님 주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영성체할 시간이 되자 성체를 우리 100만 여명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제단을 줄줄이 내려와서 부채꼴로 퍼지면서 군중 속으로 스며드는 신부님들의 모습 또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이었다. 이때가 정오경이었다.
 
폐회를 선언하고, 교황님께서 떠나시고 또한 우리가 흩어질 때가 오후 1시쯤 되었다. 물론 우리가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우리가 떠나는 광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였다. 봇물이 터져 나오듯 밀려서 광장을 빠져 나오는 인파! 모두들 배가 고팠고 광장 근처의 식당들은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던 우리 형제자매들이 아닌가! 식당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비록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정답고 반가웠다.
 
미리내 성지(1984년 5월 7일 월요일)
 
103위 시성식 바로 다음날 세계 각지에서 모인 우리 해외교포들은 한국 천주교 교포사목 후원회의 주선과 안내로 미리내 성지를 순례하였다. 나는 아내와 큰 아이를 데리고 함께 갔다. 강남 성모병원 입구에 오전 9시 30분쯤 집결하여 20여대의 관광버스에 분승하여 출발하였다. 미리내 골짜기로 인도하는 좁은 논길들이 아스팔트로 검게 포장되어 있었다. 교황님께서 방문하시리라는 기대아래 정부에서 포장을 서둘렀는데, 막상 교황님의 방문이 실현되지 않자 말이 많았다 한다.
 
미리내 성지는 현재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소재로서 한국의 수선탁덕이신 성인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 외에도, 김신부님을 마치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으며, 부제품과 사제품을 주셨던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고 페레올 주교님(1953)의 묘소가 그분의 유언에 따라 김신부님의 묘소 옆에 안장되어 있고, 사제생활 33년(1896 - 1929)을 미리내 초대본당 신부님으로 계시면서 김신부님의 묘소를 관리하며 경당과 성당을 건축하시고 교우들의 영육간 사정에 심혈을 기울이신 강도영 말구 신부님의 묘소, 1910년에 북간도 팔도구 조양하 본당 초대신부로 부임하여 10년간 봉직하시가가 거액의 금전을 요구하는 마적단에 인질로 납치당하여 심한 매질과 고문, 중노동, 귀를 꿰어 몰고 다니는 등 갖은 만행을 당하던 중 교우들에 의해 저들의 요구 금액을 지불하고 구출되어 말년을 미리내 3대 본당신부로 계시다가 선종하신 최문식 베드로 신부님(1952)의 묘소, 그리고 남편 김제준 이냐시오를 기해박해(1939)때 잃고 아들 김 신부마저 병오박해 때 잃어버리고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가 교우들의 민첩한 보호로 무사하게 되어 용인 이 공소와 이곳 미리내 교우 부락으로 전전 하시던
중, 1849년 귀국한 최양업 토마신부님(1961)과 고 주교님의 도움으로 살아가시다가 별세하신 김 신부님의 모친 고 우술라의 묘소, 1829년 용인군 이동면 묵리에서 출생하여 40세 때에는 사제가 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하시다가 라틴어를 배우기가 힘들어 그만 두시고, 서울 약현본당(현 중림동) 초대 정 신부님의 복사로 근무하시며 평생을 동정을 지키시며 수계범절에 충실하셨던, 바로 김 신부님과 고 주교님의 신체를 미리내에 안장하는데 공헌을 하시고, 92세로 선종하시면서 자신을 종산을 교회에 헌납하신 이민식 원선시오씨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이상 미리내 성지 소개문에서 발췌)
 
미리내 입구에서 오른쪽 언덕에는 성모성심 수도회의 아담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성인 김대건 신부님의 경당으로 올라가는 기은 실물 크기에 가깝게 14처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경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 14처를 지나가야 한다. 우리는 버스에 동승한 사람들을 단위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걸어서 경당의 앞마당에 이르렀다. 경당 앞에는 우리들의 미사를 위해서 제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미사는 해외 교포사목 담당 박정일 주교님, 전주 교구장이었던 김재복 주교님 및 몇 분의 외국인 주교님 그리고 수 십 명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그리고 1000여명의 우리 해외교포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드려졌다. 박정일 주교님께서도 강론 서두에서 지적하신대로 우리는 복자 김대건 신부님이 성인으로 공식 선포된 후 첫 번째로 이곳 유서 깊은 김 신부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미사를 드리게 된 축복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러웠던 점은 미사 후 점심 도시락을 분배하는데 서로 먼저 자기 실속부터 차리려는 마음들 때문에 일시 혼잡을 이루었던 일이다. 1000여명의 군중을 먹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성스러운 장소에 와서까지 잠시나마 소란스러웠던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갈릴레이 호수가에서 5000명을 먹이셨을 때에도 그러했을까?...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서한의 첫 구절이 생각났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 지어다....” 식사 후에는 오락, 사진촬영, 경당참배, 등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고, 오후 4시경 그곳을 떠나올 때는 역사적 순간들의 증인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나의 창호지같이 얄팍한 믿음에 대한 회의가 내 마음속을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저녁 6시부터 강남 성모병원 근처에 있는 서울 플라자 호텔의 그랜드 볼룸에서 해외 교포사목 담당 박정일 주교님을 모시고 교포사목후원회의 주최로 각 지역 대표자들의 만찬 겸 합동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여러분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자발적 의견피력에 그쳤고 어떤 안건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박 주교님께서는 여기서 나온 이야기는 앞으로 교포사목후원에 반영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대부분의 발언은 자기자랑을 곁들인 자기 본당이 처한 고충에 대한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목자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해외교포사목 후원회가 생각보다 많은 수고를 하고 있고, 이번 고국을 방문한 우리들에 대한 열렬한 봉사가 입증하였듯이 고국을 멀리 떠나있는 우리들에 대한 고국에 남아있는 가톨릭 형제자매들의 사랑이 지극함을 실감하면서 가톨릭인의 긍지를 억제할 수 없었다.
 
절두산 성지(1984년 5월 18일 금요일)
 
벌써 한국에 온지 18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간 사사로운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나 나는 엎드리면 코닿을 거리에 있는 절두산 성지를, 이제 가면 언제 오게 될지도 모르는데, 빼놓고 떠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뉴욕 귀환 이틀을 남겨두고 아내와 함께 옛 추억을 더듬으며 절두산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마침 신촌을 지나게 되었는데 골목길마다 지키고 서있는 경찰들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연대생들이 데모를 하는 모양이었다. 제 2 한강교 근처에서 버스를 내려 절두산을 찾아 올라갔다. 20여 년 전 야산처럼 생긴 이곳에 흙먼지 나는 들길을 걸어서 뜻 없이 놀러왔던 일, 기념성당이 생긴 뒤 한 친구의 혼배성사 때 증인으로 왔던 일, 등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모두 엊그제 일 같은데... 주위의 모습은 집들과 전철과 강변도로 등으로 가득차서 처음 오는 사람들은 옛 모습을 알 수가 없었다.
 
기념성당 입구에는 며칠 전 이곳을 다녀가신 교황님의 흉상이 근처 여러 본당교우들의 합작으로 세워져 벌써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1시간 남짓 기념관에 진열된 유물들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서 고난에 가득찬 한국 천주교 200년 역사의 맥박과 숨소리를 듣는 듯 실감이 났다. 이 유물 하나하나에 얽힌 사건들의 장면들을 연상할 때 그 박진감이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하고, 가슴을 조이는 듯도 하였다. 아! 우리는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사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지나친 편안함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듯 싶었다. 기념관을 나와 성당에 올라가서 성체께 조배를 드리고 믿음을 한층 더해 주시기를 빌었다.
 
귀환(1984년 5월 20일)
 
비행기가 뉴욕을 향해서 김포공항을 이륙하자 약 3주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정은 하루도 쉴 틈 없이 마치 회전목마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일생에 있어서 참으로 보람 있고 잊혀 질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입교한 지 20여년!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간 얼마나 오랫동안 해찰하였던가!... 시성식에 참석하고 미리내와 절두산 성지를 순례하면서 목격한 것, 그리고 이번 여행을 계기로 읽게 된 103위 순교 성인 전을 통해서 나는 나의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각오와 더불어 이러한 기회를 허용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렸다. 나의 믿음은 어쩌면 허구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 순교 선열들의 믿음이 반석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면, 나의 믿음은 사상누각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래성으로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회의가 내 가슴속을 스며들 때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무너져버리곤 하였던가!...
나는 기초공사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교선열들이 주림과 추위와 죽음과 싸워야 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믿음의 꽃을 만발하게 피웠듯이 나도 나의 믿음의 꽃을 가꾸기 위해서는 나의 생활 가운데서 무사안일을 배제하고 신앙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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