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토마스 신부님과 나 2008

정 토마스 신부님과 나
그리고 정토마스 신부 추모사업에 대한 제언
김성준 모세
 
나는 1962년 성탄절(15세)에 서울 아현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1976년 가을(29세)에 미국에 이민 왔다. 그 이듬해 1977년(30세) 사순절에 <리고 파크>에 있는 <성 안젤루스 성당>에 셋방살이하던 <퀸즈 한인 천주교회>라고 불리는 작은 한인 가톨릭 신앙 공동체에서 정토마스 신부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지나 간 한 세대를 돌이켜 보면서 만일 정 토마스 신부님이 없었더라면 이민자로서 나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생각해본다.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는 젊음과 건강이 넘치던 내 인생의 황금기(30/40대)에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정 토마스 신부님을 만나게 해 주셨다. 나는 그분 곁에서 그분이 풍기는 인품과 영향력아래 인간적 신앙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환갑이 지난 오늘에도 눈에 선한 잔잔한 미소를 띠신 얼굴의 정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며, 그 분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인간 김성준, 신앙인 김모세의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정 토마스 신부님의 특성
 
제자가 스승을 평가한다는 것은 외람된 일이다. 그러나 존경하는 신부님을 회고하면서 그 분이 이민자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그 분 주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에게 보여준 특징을 내 나름대로 몇 가지 간추려본다.
 
1. 용인술의 천재 신부님
 
신부님은 당신 주위에 모여든 신자 개개인의 탤런트를 적확하게 파악하시고 각기 맡은 직분이 교회에는 유익이 되고,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는 그 직분을 통한 인격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각기 탤런트에 맞는 직분을 안배하시는데 천재적 소질을 가지셨다. 나도 신부님이 맡겨주신 크고 작은 교회내의 직분을 통해서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신앙인 김 모세로 성장할 수 있었다.
 
2. 진리탐구정신에 투철하신 신부님
 
나는 1981년 대뉴욕지구 꾸르실료 남성 제1차를 정 토마스 신부님과 함께 수강하였다. 진명 바오로 부제님은 나와 같은 데꾸리야에서 함께 공부를 하였다. 꾸르실료에서 크리스챤 생활의 삼 요소를 신심 공부 활동이라고 한다. 신부님은 이 삼 요소 가운데 공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서울과 로마를 오가는 교수 및 석학 신부님들이 우리 성당에 들리기라도 하면, 기회를 놓칠세라 신부님은 그분들의 지식보따리를 풀게 하시고, 단기 강습회를 개최하여 신자 계몽의 기회로 삼으셨다. 강의시간에는 신부님도 학생처럼 노트와 펜을 들고 단정히 앉아서 수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강의가 끝나면 반드시 아가페시간을 마련하시고 약간 수줍은 표정으로 강평을 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신부님은 본당 내에 성서모임과 사회교시연구모임을 격려하시고, 우려를 표명하는 분들에게 “공부를 하라 해도 안 하는데,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신자들을 내가 말릴 이유가 있는가?” 하시며 진리탐구에 필수적인 자발적 자유토론을 교회 내에서 허용하셨다. 신부님은 주입식 교육은 현대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계셨다. 정 욱진 토마스 신부님이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효시 천진암 강학회에 모였던 신앙 선조들 가운데 한 분이신 정약종 성현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토마스라는 본명이 중세기 유럽의 신학대전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
3. 사회적 관심에 민감한 신부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라는 말이 있다. 신부님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8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미주 동포사회의 민주화 및 통일 운동과 연대하셨다. 망명 중이었던 김대중 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우셨고, 워싱톤 DC 백악관 앞에서 시작하여 한국 대사관 앞에서 끝나도록 계획된 “민주화 대행진”에 버스를 대절해주시고 신자들의 참여를 격려하셨다. 그리고, UN 본부 앞 <함마슐드 광장>에서 벌어진 한국 민주화 대회에도 버스를 대절해 주시고 신자들의 참여를 격려하셨다.
신부님은 “남북 이산가족찾기 후원회”의 고문직(개신교의 이승만 목사 함성국 목사, 불교의 오법안 스님과 함께)을 수락하여 당시 영사관, 어용단체 반공연맹, 등으로 부터 회유와 압력을 받았던 일도 있었다. 또한 동포 이민 교회 내에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의 설립을 독려하여 보수적인 사제협의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운동권의 일각에서는 정 토마스 신부님을 “뉴욕의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4. 이민자들의 사회적 여건에 사려가 깊으신 신부님
 
예나 지금이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가게 문 닫고 숨차게 달려와도 8시 이전에 시작하는 교회모임에 참여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부님은 사목회 저녁미사 장례기도 등 모든 저녁행사를 언제나 8시 반부터 시작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귀가시간은 늦은 밤 11시 내지 12시가 다반사였다. 신자들이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고 교회가 신자들을 위해서 있다는 생각에 투철하셨다.
 
글이 좀 딱딱해서 제언을 하기 전에 나와 신부님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한다. 신부님이 은퇴하신 직후 신부님과 함께 <델라웨워 강> 줄기로 펜실베니아 주와 접경을 이루는 뉴욕 주 서북부에 있는 <포트 져비스>에 훗날 메리놀 선교사가 되신 박 종호 패트릭과 이 부자 아가다 두 분이 살던 별장에 초대받아 놀러간 적이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은 아침부터 델라웨워 강에 뱃놀이를 나가고, 별장에는 신부님과 나밖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신부님께서 우리 둘이 낚시나 갈까 하셔서, 나는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신부님을 모시고 신부님이 가자는 데로 갔다. 으슥한 강가에 자리를 잡고 침묵 속에 신부님은 계속 강물에 낚시를 드리우고 나는 가까운 바위에 걸터앉아서 신부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신부님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시며 나를 손짓하여 당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부르셨다. 나는 얼떨결에 가까이 다가갔다. 신부님은 당신이 쥐고 있던 낚싯대 손잡이를 내 손에 쥐어 주시며, 어때?.... 하고 물으셨다. 낚시 바늘에 걸려든 물고기가 요동을 치는 것이 낚시 대 손잡이를 통해서 내 손바닥에 바르르 느껴졌다. 신부님은 무료하게 바위에 앉아있는 나에게 낚시질 맛이 어떠한 것인지 몸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 같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신부님이 낚은 물고기는 반 초롱 정도 되었다. 그 물고기들은 그 날 저녁 소주 안주로 여러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어주었다.
추모사업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착한 목자 정 욱진 토마스 신부님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나고 안계시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궁행 실천하시던 그분의 정신과 성스러운 모습은 우리 초기 이민자들의 가슴속에 잔잔히 남아있다.
 
이민초기 한 세대가 바람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는 분들의 숫자도 점차 줄어드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 앞으로 10년 후면 우리 교회 공동체의 기억에서 부르클린 교구 내에서 시작한 우리 이민교회 <성 바오로 정하상 교회>의 역사가 완전히 잊혀 질 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 토마스 신부 10주기를 기념하는 올 해가 우리가 일궈온 이민교회 1세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정 토마스 신부 추모사업”을 시작하는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로써 사목회 산하에 “정 토마스 신부 추모 사업회”를 결성하고, 정 토마스 신부를 추모하는 사업을 추진할 것을 이 가별 본당 신부님께 정중히 제안한다.
 
신자 수가 200만이 넘는 부르클린 교구 내에서 소수 민족들의 한 공소에 지나지 않던 우리 교회 공동체가 교구로부터 본당으로 인정받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여하 간에 그 창립자에 대한 기억의 표지를 앞으로 올 세대에 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추모 사업은 크게 돈이 드는 사업이 아니다.
 
추모 사업의 예를 들면, 지하 강당을 “정 토마스 회관” 으로 명명하고 그 안에 추모 도서관을 설치하고, 정 토마스 회관 관리 위원회를 구성하여 회관의 지속적 업그레이드, 발전기금 모금, 등을 하도록 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채의 주택을 “정 토마스 청소년 회관”, “정 토마스 경노 회관”, 등으로 명명하고 역시 각 회관 관리 위원회를 구성하여 각 회관의 지속적 업그레이드, 발전기금 모금, 등을 하도록 할 수 있다. 각 관리위원회가 벌이게 될 사업은 우리 공동체에 여러 가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회도 가져올 것이 확실하다. 우선 추모 사업회의 결성과 더불어 우리가 갖고 있는 여러 채의 주택을 그러한 목적으로 명명하는 현판식이라도 거행하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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