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04

고국 방문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04년 10월
 
이번 여행은 평통 사무처가 서울에서 주최한 북미주, 구 소련지역 및 유럽에 거주하는 평통위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가족을 동반한 대통령 면담과 금강산 일일관광을 일정에 포함하고 있어 빽빽한 일정이지만 여러 해외지역에서 거주하는 펑통위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기회가 되었다. 나는 작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 소집한 국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평통 위원들의 전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초선 위원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언제나 베일에 싸였던 청와대를 생전 처음으로 방문하고 내 나이또래의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 손도 잡아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불과 1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또다시 방문하겠다는 나를 불만스런 눈초리로 째려보는 아내의 눈초리를 따갑게 느끼면서도 가야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남한 사람들에게 반세기동안 금단의 땅으로 여겨졌던 북한 땅의 일부인 금강산을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육로로 갖다오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1984년 봄에 미국에 이민 온지 8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해외동포로서 북한이 파놓은 땅굴을 관람하고 판문점을 방문하여 북쪽을 바라보며 기구한 우리 민족의 운명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89년은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 연방이 해체되던 해였는데, 우리 한반도에서는 남한의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오자, 남한의 학생 임수경과 그녀를 동반한 문규현 가톨릭 신부가 판문점을 통과하여 벌집을 쑤셔놓은 듯 온통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기였다. 그 해 뉴욕에서 결성된 이산가족찾기 후원회 회원자격으로 나도 1989년 가을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들어가 원산과 금강산 일대를 관광하고, 개성과 판문점을 방문하여 그 때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 반세기동안 보통사람들이 넘을 수 없었던 휴전선을 가로질러 북한 땅을 가본다는데 의미가 있다면 있다고 생각하고 한 번 가본 데지만, 다시 한 번 가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평통회의의 공식 일정이 10월3일 일요일부터 10월 7일 목요일까지 확정되자 우리 뉴욕 협의회에서는 위원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10월 7일부터 10월 9일까지 단체로 움직이게 되므로 친구와 친지들을 만날 기회를 그 전후로 잡고 9월 27일 월요일 저녁에 떠나서 10월 11일 월요일 저녁에 돌아오는 14일간의 여행계획을 세웠다.
 
뉴욕 출발
 
예정대로 9월 27일 월요일 밤 아시아나 항공기는 나를 싣고 뉴욕을 떠났다. 몸이 뻣뻣해지고 꼬이는 길고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 때는 9월 29일 수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휴대폰을 빌리고 쓸 돈을 조금 바꾼 뒤 뉴욕을 떠나기 전 이메일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대전에 사는 이 교수를 만나러 대전행 버스에 올라 앉았다. 마침 추석 연휴가 끝나는 무렵이라 하행선은 한가하나 상행선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 장사진 때문에 상행선을 따라 올라오는 버스가 한 시간정도 연착하였다. 여하 간에 나는 대전에 도착하여 내 대학시절의 친구 이 교수를 1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교수는 내 주문대로 10월 3일 일요일 잠실 롯데 호텔에 신고하기까지 남은 4박5일간의 여행일정을 짜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교수는 나와 같이 대학시절을 보냈고, 내가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하던 때 프랑스에서 국제무역학 박사학위를 딴 후 귀국하여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 교수직을 맡고 있는 국제무역 및 경제에 정통한 지식을 가진 한국의 지식인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불과 30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세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눈부신 경제성장과 이에 상응하는 정치적 자유와 발전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작년에 만났을 때 그로부터 들었던 개인 특강의 내용이었다. 이 교수는 나를 친구로서 좋아했고, 해외에 사는 나에게 한국의 경제와 정치의 발전상에 대해 학자적 관점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했고, 나는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그의 해박한 지식이 담긴 개인 특강을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의 개인 특강은 이 교수가 운전하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그의 자동차 안에서 줄곧 질의응답식으로 이어졌다.
 
전남 광주 행
 
전남 광주는 내가 태어나서 중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살던 곳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올라온 이래 관계가 끊긴지 40여년이 경과하였지만 아직도 광주, 화순, 능주, 등지에 4촌 형제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만나보고 어린 소년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었다. 9월 30일 목요일 오전 대전을 출발하여 광주에서 하루를 묵을 생각으로 남쪽으로 향하였다. 점심때쯤 전주에 잠시 들려서 전주 특유의 한정식을 들고 또다시 광주로 향하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때 피로 물들었던 금남로에서 광산치과를 경영하는 사촌형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사촌 누님과 연락이 되어 저녁 약속을 해놓고, 옛 기억을 더듬으려 광주의 거리들을 배회하였다. 예전에는 큰 거리였지만 지금은 매우 좁아 보이는 금남로와 서울 명동의 골목길처럼 변해버린 충정로 골목들, 그리고 아직도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광주 도청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들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충정로 우체국 근처의 어는 식당에 사촌형과 사촌 누님이 나를 보러 모였고, 뜻하지 않게 공무원 생활을 하며 능주에서 식당업을 한다는 사촌동생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우리들의 어린 시절과 그간 지나온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보길도 행
 
다음날, 10월 1일 금요일 아침 콩나물국으로 간단히 숙취를 달래고 우리는 남쪽으로 향하였다. 목적지는 조선조 말에 고산 윤선도 선생이 조정의 당파싸움에 신물이 나서 은둔생활을 하러 노비와 가솔을 데리고 탐라도(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원래 뜻하던 탐라도는 못가고 중간에 잠시 풍랑을 피해 기착했다가 영구히 머물게 된 보길도라는 섬이었다. 보길도는 소설가 최인호에 의해서 해신이라 불린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846)의 거점 청해진이 있는 완도로 다리를 건너서 들어간 후 바닷길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화흥포 항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거의 매시간 사람과 자동차를 함께 실어 나르는 연락선이 있었다. 이 교수와 나는 이 연락선에 몸과 차를 실었다. 둥실둥실 1시간 20분 정도 지나자 여러 섬을 경유하여 보길도에 도착하였다. 우선 숙소를 정하고,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창작하고 읊었다던 고산의 기발한 착상으로 만들었다는 연못과 누각으로 이루어진 고산의 무대 세연정과 가끔씩 은둔하였다는 바위굴을 둘러보고 나니 날이 저물었다. 이날 저녁은 물론 싱싱한 생선회와 매운탕이었다.
 
다음날 아침, 10월 2일 토요일, 이 교수와 나는 대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찍 아침을 들고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숙종의 비위를 거슬려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가 보길도 어느 바위 밑에서 숙박하며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치솟아 손수 글을 새겨두었다는 글씐 바위를 잠시 둘러보고, 바로 선착장으로 향하였다. 느긋하게 여러 군데를 둘러볼 여유가 없어 아쉬웠지만 다도해 땅끝까지 왔다는데 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주마간산이었다. 이 외딴섬 구석구석까지 전기, 전화, 휴대폰, 수세식 화장실, 냉장고, 더운 물 찬 물이 나오는 샤워시설, 전기 온돌방, 등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강진, 보성 방면으로
 
돌아가는 길은 온 길과 약간 다른 방향을 잡았다. 점심때쯤 이조말기 실학파의 우두머리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를 하면서 500여권의 책을 집필했다는 강진의 다산초당에 도착하였다. 다산초당과 새로 지은 기념관은 강진군청이 관리하고 있었다. 다산은 근처에 있는 백양사 주지스님에게 차를 재배하고 다리는 법을 배워서 책을 쓰다가 피곤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초당의 앞마당에 놓인 큰 석반 위에 앉아서 차를 다려 마시곤 했다고 한다. 다산이 기거했던 초당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다산식당이라고 팻말이 붙은 먹거리 식당의 넓직한 편상에 앉아서 이 교수와 나는 녹차 수제비와 동동주를 시켜놓고 날씨 좋은 가을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고 분위기가 운치가 있어서 하루쯤 더 쉬었다 가고 싶은 충동이 있었으나, 아쉬움을 뒤에 남긴 채 보성의 차밭으로 향하였다. 보성에는 차밭이 수십 군데 있어 차밭과 녹차로 만든 여러 가지 제품이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어 있었다. 어떤 드라마의 연애장면에 등장하였다는 차밭을 둘러본 뒤 식당에서 녹차로 만든 냉면을 맛보고 발길을 재촉하여 광주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대전을 가려면 광주를 통과해야 하고, 능주와 화순을 경유해야 광주가 나온다. 예전에는 능주역에서 광주역까지 석탄을 때는 기차로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차로 20-30분이면 주파가 가능하다고 한다.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어차피 저녁을 먹어야겠기에 휴대폰으로 능주에서 식당업을 한다는 사촌동생을 불렀다. 능주에서 중등학교 1학년을 마칠 때까지 광주까지 기차로 통학을 하던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 논길과 시골 골목길들을 그려보며 그 때 머물던 그 집을 찾아갔다. 물론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 그 집은 굉장히 크고 무성한 고목나무 밑에 그 동네에서는 큰 초가집이었고, 넓은 황토 흙 마당 옆으로 사랑채가 있었는데 나는 사랑채에서 기거하였다. 그런데 그 집들은 모두 없어지고 새로 지은 집들이 빽빽이 마당을 채우고 집지키는 구렁이가 살았다는 고목나무는 초라한 모습으로 집 뒷켠에 간신히 살아남아 있었다. 사촌동생과 처음 만나보는 재수 씨와 막내딸이 나를 반겨주었다. 식사를 하며 옛 이야기와 지나온 삶의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광주를 지나 대전에 도착할 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10월 3일 일요일 아침 유성온천에서 며칠 동안 쌓인 여독을 풀고 해장술을 마시면서 이 교수와 헤어질 채비를 하였다. 서울 잠실로 향하는 버스에 짐과 몸을 실었다. 지난 3일 동안 차안에서 이 교수와 나눈 대화와 한국의 정치경제현황에 대한 이 교수의 특강을 상기하면서 상행선상을 달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을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달성한 국가로서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지금 겪고 있는 경기침체현상은 한국의 정부주도의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서 기업주도의 기술집약적 산업구조로 전환하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IMF가 YS의 실책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경기침체현상을 노무현의 개혁정책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IMF도 현재의 경기침체도 전환기적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개혁정책은 경기침체와 무관하다. 개혁은 정치로 풀고 경제는 기업정신과 경제 원리로 풀어가야 한다.” “행정수도 이전은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행정수도 이전이 국가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물음 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가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반대를 한다.” “과거사 청산은 더 이상 미뤄야할 이유가 없다. 과거사 청산은 과거를 들춰내서 보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밝혀서 국가의 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득권 세력이 대부분 과거사에 연루되어있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과거사 청산이냐, 경제를 먼저 살리고 다음에 해도 되지 않느냐는 논리로 반대하고 있다.” “국가 보안법 철폐도 기득권 세력의 이해와 얽혀있다. 국가 보안법은 정권안보를 위한 법이었지 국가안보를 위한 법이 아니었다. 국가 보안법의 철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법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두려운 금단심리현상을 겪고 있다. 국가 안보는 현행 형법으로 유지가 가능하다는 형법학자들의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 “기득권을 가진 한나라당은 정치와 경제를 연계하여 노무현을 끌어 내리려하고 있지만, 노무현은 자기 집권기간에 결코 빛나지 않을 정치개혁을 수행하고 있으며, 경제부양은 기업가들의 기업정신과 시장경제원리에 맡기고자 한다. 이제는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여 정경유착을 가져왔던 과거로 복귀할 수 없다. 노무현은 역사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잠실 롯데 호텔에 등록하고 나니 저녁때가 되었다. 대학시절 자취를 같이 했던 선배가 찾아와서 나는 그 선배와 근처의 먹거리 동네로 발길을 옮겼다. 이 선배는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를 좋아하였는데 그 점에서 나와 뜻이 맞았다. 그래서 대학시절에는 막걸리도 함께 많이 마셨고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만나면 술과 안주를 앞에 놓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 선배는 36세의 아들과 32세의 아들이 있는데 두 놈 다 직장이 없어 빈둥거리고 있다고 한다. 오늘 선친의 산소 가는 길에 함께 데리고 갔다가 평소에 자식들에게 갖고 있는 불만을 토로하며 호되게 꾸중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도 내 세 아들과 있었던 여러 가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맘대로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식농사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 선배는 작년에 왔을 때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말을 했는데, 이번에는 노무현을 심하게 욕하고 있었다. “말을 헤프게 해서 대통령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경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보안법 폐지와 과거사 청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비판으로 침을 튀기고 있었다. 같은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지만, 분야가 다른 이 교수와 대조적인 생각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둘이 붙여놓으면 금방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많은 정보를 종합하여 말하는 이 교수의 논리가 이 선배의 단순논리보다 더 믿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락의 도시 서울
 
다음 날, 10월 4일 월요일은 평통 사무처에서 마련한 계획에 따라 참여정부의 외교정책(외교통상부차관보)과 주한미군재조정과 협력적 자주국방(국방부차관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평화번영정책과 민주평통 발전방안에 대한 평통위원들 간의 분과토의로 시간을 보냈다. 민주평통 발전방안에 대해서는 평통위원들의 여러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으며, 개진된 의견은 종합되어 차기 12기 인선과 구성에 반영된다는 이야기였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뉴욕협의회 위원 일부는 단합대회를 한다고 모여서 서울의 밤거리로 빠져나갔다. 나도 뉴욕에서 온 고교 동창생이 찾아와서 술을 마시며 서울의 밤거리를 방황하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 잠들기 전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이었다. 단합대회에 가담한 내 룸메이트는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10월 5일 화요일 오전에는 평화번영정책 추진현황(통일부 장관)과 남북경협(개성공단사업단장)의 이야기를 듣고, 오후에는 청와대를 나로서는 두 번째로 방문하였다. 대통령이 ASEM회의 참석과 인도, 월남 방문으로 출국하여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비서실장이 대신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청와대에서 롯데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치고 500여명의 금강산 관광 신청자들을 태운 14대의 관광버스는 기다리던 금강산 관광을 위해 강원도 고성을 향하여 동쪽으로 밤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서야 현대 아산이 운영하는 금강산 콘도에 들어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잠입 그리고 탈출
 
다음 날, 10월 6일 수요일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이른 식사를 하고 남측 출입국 사무소롤 이동하여 남한 출국수속을 밟고 휴전선을 통과하고 있었다. 휴전선 중간지점까지 1마일 정도는 남한 군인이 지키고 있었고, 휴전선 중간지점에서 북한 군인의 검문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북측 출입사무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지나가는 버스를 응시하는 북한 군인들이 손에 붉은 깃대를 들고 군데군데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붉은 깃대는 환영의 표지가 아니고 감시의 표지”라는 잘 훈련되고 세련된 현대 아산 직원 안내양의 설명이었다. 이동 차량 안에서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절대로 사진 찍는 흉내를 내지 말라는 경고도 있었다. 사진을 찍다가 걸리면, 붉은 깃발로 연락하여 그 사람이 탄 버스를 즉각 세우고, 그 사람에게 벌금을 물린다는 이야기였다. 안내양의 이야기를 들으며 북방 휴전선을 통과하는 사이에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입국수속을 밟고 금강산 아래 마련된 휴게소에 도착하니 남쪽 고성 금강산 콘도에서 출발한 지 4시간 이상 경과하였다. 남북 화해와 신뢰회복의 속도만큼이나 느리고 오래 걸렸다. 인내가 필요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50년을 기다렸는데 5시간인들 못 기다리겠는가.
 
하루 여행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서둘러야 간신히 구룡폭포와 삼일포 두 군데를 돌아볼 수 있었다. 보행이 느리거나 서두르지 않으면 한 군데 밖에 볼 수 없었다. 이맘때면 추색으로 물들어 있을 터인데 어찌된 일인지 금강산에서 아직도 단풍을 구경할 수 없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재촉이라도 하는 듯 계속되는 따뜻한 날씨 때문일까. 추위를 예상하여 여벌로 가지고 온 보온 옷은 귀찮은 짐이 되고 있었다. 내 딴에 부지런히 서둘렀지만, 구룡폭포에 올라갔다 내려오니 삼일포로 가는 버스가 금방 떠난 후였다. 하는 수 없이 점심을 들고 선물 판매장에서 우물쭈물하다 보니 금방 출국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박2일이나 2박3일 정도 있어야 볼만한 데를 두루 보고 먹거리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측 출입사무소, 휴전선, 남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여 고성 금강산 콘도에 돌아오니 해가 저물었다. 금강산 콘도에서 차로 5분 거리에 30여개의 횟집이 있다는데 워낙 피곤하여 일지감지 금강산 산행으로 뻐근한 다리를 주무르며 잠이 들었다.
 
제주도 행
 
다음 날, 10월 7일 목요일 아침을 먹고 고성을 등지고 짐을 맡겨둔 잠실 롯데로 향하였다. 서울-고성 동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옆에 만들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달리는 길은 꾸불꾸불해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3-4시간이 걸리는 길인데, 고속도로가 완성되면 1-2시간이면 동서를 주파하게 된다는 계산이다.
 
제주 행 비행기는 김포공항에서 출발하였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관광 안내원이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간 식당에 도착하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식당 간판에 “한저 옵서예”라는 표지가 있는데, 이 말은 “혼자 오시라는 뜻이 나이고 어서 오시라는 뜻”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해 주었다. 제주시에서 제주도를 가로질러 30-40분 가면 서귀포시가 나오는데, 여기에 우리가 묵을 제주 롯테호텔이 있었다. 절벽에 건물을 지어서 호텔 로비가 8층에 해당되었다. 멋있는 고급호텔이었다. 짐을 풀고 바닷가 횟집으로 향하였다. 해녀가 잡아 올린 자연산 전복과 제주도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생선을 비싸지만 맛있게 먹었다. 자연산 전복은 바다 속에서 오래 동안 자란 것을 캐기 때문에 그 크기가 양식한 전복의 3-4배정도 되었고, 껍질에 이끼가 끼어있었다.
 
다음 날, 10월 8일 금요일 우리 일행은 골프 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관광만 원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나는 물론 골프를 택했다. 한국에서는 처음 해보는 골프였다. 오전에 골프를 끝내고 오후에는 관광을 택한 사람들과 합류하여 관광 안내원이 안내하는 데로 해가 저물도록 돌아다녔다. 30여 년 전 보았던 제주도는 대한항공 호텔이 유일한 호텔이었으며 도로와 관광자원 개발이 매우 미개한 상태였다. 그러나 오늘 제주도는 사통팔달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밤은 마치 큰 도시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관광 안내원이 데리고 들리는 곳마다 관광자원이 개발되어 있었고, 볼거리와 먹거리가 무성하였다. 나는 여기서 암 치료와 예방에 특효가 있다는 상황버섯과 간 기능 향상에 좋다는 동충하초가 제주도 내에서 상업화되어 판매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 10월 9일 토요일 우리 일행은 관광 안내원의 안내로 다시 여러 군데를 들리면서 오후 5시10분 김포 행 비행기 시간까지 소일하였다. 마지막 들린 곳은 인기영화 “올 인”의 촬영처였다. 멋있는 문화공간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들은 횟집에 둘러앉아서 멍게, 해삼, 게불, 등을 섞은 회를 시켜놓고 우리 그룹 일정의 마지막 축배를 들었다.

마지막 일정
 
집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나면서 뉴욕으로 하루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자기가 사는 곳이 제2의 고향이라 하지 않던가. 한국은 내가 태어나서 30년간 살았던 나의 고향이련만 미국 뉴욕이 내 고향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난 28년의 이민생활로 일군 내 삶의 터전과 내 가족이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여하 간에 나는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 강남구 협의회가 마련한 저녁식사에 참석하였다. 마침 뉴욕에서 활약하다 10여 년 전 귀국한 국악인 손정아 씨가 우리 뉴요커들을 위해 찾아와서 멋들어진 창을 몇 곡 불러주었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일산에 거주하는 처남 집으로 향하였다. 마침 세계 불꽃놀이 대회가 한강에서 열린 관계로 교통체증이 심하였다. 작년에 왔던 처남 집에 당도하니 자정이 지났다.
 
다음 날, 10월 10일 일요일 나는 내 고교시절 세 살이 하던 신촌 로타리 부근과 고교시절 교회생활을 하던 아현동 굴레방 다리 부근의 천주교 아현동 교회, 이모와 사촌동생이 살던 이태원과 한남동 로타리 근처, 아내를 처음 만났던 장소 동대문 근처, 대학을 다니면서 하숙집과 자취방을 전전했던 이문동, 등을 찾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처음 내린 곳이 연대입구였다. 여기서부터 나는 신촌 로타리, 신촌 역전, 이대입구, 아현동 고갯길을 넘어 굴레방 다리 근처에 있는 아현동 천주교회까지 옛날과 그때 그 친구들을 회상하며 걸어갔다. 모든 것이 거의 다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보고 느꼈다. 지하철을 타고 이번에는 이태원 쪽으로 향하였다. 이태원 입구에서 내려 또다시 다는 내가 잠시 기거하던 사촌 동생이 살던 집을 찾아 골목길을 헤맸다. 소식이 끊긴 동인지라 혹시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동대문 쪽으로 돌렸다. 동대문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처가식구와 약속한 저녁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화방면 일산 주엽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저녁식사 역시 처 작은 아버지, 어머니, 출가한 자녀들 그리고 처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지나간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다음 날, 10월 11일 월요일, 나는 어제 시간이 촉박하여 가보지 못한 이문동 외대 앞을 향하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외대 교정에 들어서 둘러보니 그 때 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주위의 신축건물에 눌려 초라해진 본관 건물과 도서관 앞의 개교 15주년 기념탑뿐이었다. 떼지어 움직이는 젊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그 때 그 학창시절이 그리움으로 엄습해왔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는 푸쉬킨의 말을 생각하며, 저녁 7시 50분 발 뉴욕행 아시아나 항공기를 탑승하기 위해 발길을 외대 앞 전동차 정거장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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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년에 저는 중학생으로 한창 공부하면서 아저씨를 뵜던 기억이 납니다.
    짧은 일정동안 한국에 계시면서 모든곳을 다 둘러보신듯 합니다^^ time efficient하게 계셨던것 같습니다 하하.
    저희 아버지와 5일동안 여행을 하셨다니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여행 중의 저희 아버지의 개인특강을 들으셨다니 부럽습니다~ 하하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켜오신 두분의 우정또한 정말 부럽네요 ^^
    여행도 하시면서 모임에 참석하시고 여행기도 작성하시랴 바쁘셨을 텐데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아저씨의 글 솜씨는 제가 많이 배워봐야 할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방문하여 댓글도 남기고, 글도 자주자주 읽어 보겠습니다^^

    숫자만 공부하는 공대생이어서 짧은 글솜씨는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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