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Showing posts from 2011

성서모임 1986

1986년 새남터 4호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그 하느님의 말씀에 접하는가 하는 물음에는 대답이 궁해지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실정이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접하기는 주일 미사 때 듣는 독서와 복음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가 싶다.   성서모임의 참가자들은 지난날 생명의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한 까닭에 타성에 젖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이제 성서의 말씀과의 지속적인 친교를 통해서 활력을 찾게 됨을 체험한다. 또한 교회의 교리, 기도서, 전례, 등이 모두 성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성서모임을 통해서 재확인하게 됨으로서, 여태까지 지루하고 형식적인 것만 같았던 전례가 얼마나 심오한 뜻을 머금고 있는지를 알게 되며, 따라서 그 전례를 통해서 더 많은 은총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국 교회에서는 약 20년 전부터 이러한 성서모임 운동이 벌써 도입되어 전개되었고,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을 통해서 은총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요즈음 우리가 모이는 형태의 성서모임은 한국 교회로부터 전래된 교재와 봉사자를 통해서 시발된 점이, 성령운동, 부부주말, 꾸르실료, 등 교회내의 다른 여러 신앙쇄신운동이 한국 교회로부터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 역수입된 현상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모이는 형태의 성서모임이 시작된 것은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작년 11월 7일 목요일 저녁 전교회관에서 신망애 성서모임이 발족한데 이어 곧 겨자씨 성서모임이 결성되었고, 현재 무려 6개 성서모임이 매주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 모여서 성서의 말씀을 서로 나누고 있다. 성서모임은 성서를 학구적으로 공부하기 위한 모임이라기보다는 성서의 말씀을 우리의 생활로 받아들이기 위한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모...

사망률과 기대수명 1985

1985년 새남터 3호   생명보험(Life Insurance)에서 사망률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 말은 사람의 나이, 성별, 직업, 건강 상태, 등에 따라서 죽을 확률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말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적은 사람보다 죽을 확률이 높고, 남자는 같은 나이의 여자보다 죽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확률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내게 되는 것이다. 반변 연금(Annuity)에서는 기대 수명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연금을 받을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를 따지는 말이다. 죽을 확률을 따지는 것 보다는 한결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비정한 숫자가 개재되어 있다. 즉, 나이가 적은 사람은 많은 사람보다 오래 살 가능성이 크므로 연금액은 줄어들게 된다. 또한 여자는 남자보다 오래 살 가능성이 크므로 같은 나이에서 더 적은 액수의 연금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남녀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소송이 걸린 일도 있다.   그러나 정녕 개개인의 삶과 죽음은 이러한 확률적 통계 숫자와는 무관한 것이다. 과연 나의 잔여 생명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또는 어떠한 모양으로 죽게 될 것인가는 오직 우주 만물을 주재하시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지난 정월 어머니회 파티에서 흥겹게 춤을 추던 바오로 이성언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불과 9개월 전의 일인데 이제는 만나서 이야기할 수 없는 고인이 되었으니, 낙엽 떨어지는 가을의 도래는 더울 쓸쓸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기 일주일전 그의 병실을 찾아 갔을 때 평소에 형처럼 다정하게 모이세! 하고 내 본명을 부르던 그는 더 이상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좀 더 일찍 찾아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 중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불과 1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들이지만 마치 오래오래 살 것처럼 먼 장래를 생각하며 계획을...

믿음은 봉사할 수 있는 힘 1988

불법체류자 사면신청 봉사를 마치고 퀸즈 한인 천주교회 사목회 사회복지분과 위원장 새남터 5호 1987 - 1988   믿음은 봉사할 수 있는 힘   "믿음은 밤에 무릎을 꿇고 그저 기도드리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그저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무한한 영광을 그저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기쁨을 앗아가는 죄를 그저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전력을 경주하는 노력, 과감한 모험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봉사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무엘 E. 키서   영주권이 없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조이며 사는 사람들이 소위 불법체류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다행히 부모나 형제의 연줄로 이민온 사람들에게는 영주권이란 물이나 공기처럼 당연히 주어지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불법으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주권이란 타는 목마름에 물처럼 귀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사면 신청자들에 대한 변변치 못한 봉사를 마치면서 그간의 경위를 소감을 섞어가며 보고하는 식으로 써보고자 한다.   봉사한 사람들   우리 본당의 봉사 쎈타는 부르클린 교구청 이민봉사실(The Catholic Migration and Refugee Office) 산하 한 분실로서 사목회 사회복지분과 소관으로 본당 신부님의 적극적 지원과 청년회 및 레지오 마리애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로 설치 유지되었다.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지만 시종 자원 봉사자로 일한 사람은 김미원, 김성호. 김진석, 백영덕, 성미정, 이경희, 이대호, 이미영, 이정호, 이안나, 정구진, 정유경, 한기남, 등 13명이다.   봉사경과 및 사면의 실상   봉사 센타가 설립되자 대대적 홍보와 더불어 1987년 5월 20일 수요일 저녁 학교 강당을 빌어 첫 계몽의 밤을 실시했다. 그리고 5월 27일. 6월 17일, 6...

한태격씨의 글을 읽고 2004

한국일보 2004.5.21                                  김성준(평통 차세대분과 부회장)   최근 1997년 8기부터 현재 11기까지 연임해온 평통위원직을 사임하면서 구구한 변명을 발표한 한태격씨의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 이 글을 쓴다. 그가 한 말을 일일이 반박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고 그와 다른 생각도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한씨 글의 논지는 압축 경제성장을 이룩한 역대 독재정권과 기업인들에게 감사하고, 한국을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구해주고 한국 수출상품의 거대한 시장을 제공해주는 미국에 감사하고 역사를 외면하고 현실과 국제관계를 직시하지 못하고 환상을 정책화하려는 사람들의 조직에 동조할 수 없어서 평통위원직을 사임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경제성장을 위해서 땀흘린 사람들을 미화하고 보다 발전된 자유민주주의를 가져오기까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마치 무위도식이나 하며 지냈던 사람들로 비하하고 있다. 그의 시각은 균형을 잃고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한반도 분단이후 경제적으로 보다 윤택하고 정치적으로 보다 민주적인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한국을 이끌어 온 두 수레바퀴가 있었다면 그것은 압축경제성장을 주도한 사람들(수구)과 민주화를 주도한 사람들(개혁)이다. 두 세력이 있었기에 보다 윤택하고 보다 민주적인 오늘의 한국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해야 할 때이다. 이제 서로 이마를 맞대고 등을 두드려주며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지혜를 짜내야 할 때이다. ...

다양성 가운데 일치 ‘샐러드 보울(Salad Bowl)’ 2004

한국일보 2004.4.2                                                               김성준(평통 차세대 분과 부회장)   최근 뉴욕 평통이 대통령 탄핵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표명했다고 해서 요즘 동포사회에 왈가왈부 의견이 분분하다. 참으로 보기 좋은 현상이다. 회장을 역임했던 분 가운데 네 분(최희용, 윤계초, 오영준, 정영인)이 이에 불만을 표시하고 고문직인지 평통위원직인지를 사임한다는 것을 기자회견으로 밝힘으로써 분분한 의견을 더 부채질하는 격이 되었다.   금강산 관광 및 북한 아동을 위한 분유 전달차 서울 경유, 북한을 방문 중인 박준구 회장은 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시하고, “성명서 내용 일부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으나, 평통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헌법기구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평통 의장인 대통령을 지지하고 참여정부의 통일정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발표한 <탄핵정국에 대한 평통 집행부의 정치적 견해> 발표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논리로 평통의 성명서와 관련, 평통 사무처에 부정적 의견이 담긴 공문을 보낸 총영사관의 행동에 대해서도 “대통령을 적극 보좌해야 할 총영사관의 행동도 객관성과 중립성을 결여한 태도”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설상가...

도전과 응전 2005

2005년 1월 13일 한국일보 평통 차세대 부회장 김성준   영국이 낳은 20세기의 석학 토인비는 문명의 발생, 성장, 쇠퇴, 붕괴가 결정되어 가는 과정을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새로운 역사철학을 정립한 사람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개인이거나 집단이거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도전과 응전의 끊임없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도 그 개인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의 결과이며, 국가나 민족에게 있어서도 그 국가나 민족에게 끊임없이 닥치는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의 결과가 그 민족의 흥망성쇠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상상력과 용기에 따라서 같은 조건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맺는 다양성의 장이 인류의 역사의 무대라 할 수 있다면, 때로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도전 앞에서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는 슬기와 끈기가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응전이 요구되기도 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요즈음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의 진전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한반도 주위의 4개 열강(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들의 활동들을 예의주시하면서 떠오르는 화두가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이다. 19세기의 서세동점의 결과로 우리 민족에게 덮쳐온(무지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일제강점시대도,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제의 종말과 더불어 졸지에 찾아온 해방 아닌 해방(우리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시작된 지난 60년간의 분단시대도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 앞에 다가온 도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응전을 하지 못한 무능력의 대가가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과거는 지나갔고, 그 지나간 과거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도전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여러 가지 주변정세를 볼 때, 우리 민족 앞에 놓인 도전의 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04

고국 방문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04년 10월   이번 여행은 평통 사무처가 서울에서 주최한 북미주, 구 소련지역 및 유럽에 거주하는 평통위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가족을 동반한 대통령 면담과 금강산 일일관광을 일정에 포함하고 있어 빽빽한 일정이지만 여러 해외지역에서 거주하는 펑통위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기회가 되었다. 나는 작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 소집한 국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평통 위원들의 전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초선 위원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언제나 베일에 싸였던 청와대를 생전 처음으로 방문하고 내 나이또래의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 손도 잡아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불과 1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또다시 방문하겠다는 나를 불만스런 눈초리로 째려보는 아내의 눈초리를 따갑게 느끼면서도 가야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남한 사람들에게 반세기동안 금단의 땅으로 여겨졌던 북한 땅의 일부인 금강산을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육로로 갖다오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1984년 봄에 미국에 이민 온지 8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해외동포로서 북한이 파놓은 땅굴을 관람하고 판문점을 방문하여 북쪽을 바라보며 기구한 우리 민족의 운명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89년은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 연방이 해체되던 해였는데, 우리 한반도에서는 남한의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오자, 남한의 학생 임수경과 그녀를 동반한 문규현 가톨릭 신부가 판문점을 통과하여 벌집을 쑤셔놓은 듯 온통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기였다. 그 해 뉴욕에서 결성된 이산가족찾기 후원회 회원자격으로 나도 1989년 가을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들어가 원산과 금강산 일대를 관광하고, 개성과 판문점을 방문하여 그 때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적이...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다녀와서 1984

출발(1984년 4월 30일 화요일)   얼마나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던가! 특히 아내는 4년 전 한 아이와 함께 다녀온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남편과 더불어 자랑스러운 세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간다는 기대에 들떠있었다. 나로서도 7년만의 방문인지라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탔던 대한항공 전세 비행기는 북미 동부지역의 각지에서 모인 교우들로써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엔진 소음과 어수선한 분위기가운데서도 동승한 신부님들의 강론이 줄곧 계속되었고, 앵커리지 공항 대합실에서는 고백성사를 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캄차카 반도 근처의 상공을 지날 때는 1983년 9월 22일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주도하는 미사가 거행되었다. 기상강론, 기상성찰, 공항 대합실에서의 고백성사, 그리고 기상미사와 영성체 등 좀체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설레고 술렁이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 한 마음 한 뜻을 이루고 있었다.   103위 시성식(1984년 5월 6일 일요일)   이날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100여만 인파중의 한 사람으로서 군중속의 한 사람으로서 목격한 장면은 나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아니할 감동적인 한편의 영화 같은 것이었다.   이날 해외교포들은 여의도 윤중 중학 교정에 아침 5시30분까지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장인과 장모는 시흥동 본당소속이었는데 벌서 3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나와 아내는 4시 30분쯤 아직도 캄캄한데 집을 나섰다. 한길로 나갔는데도 캄캄했고, 쏜살같이 지나다니는 화물트럭과 택시들의 명멸하는 불빛만이 눈에 띄었다. 가로등은 에너지 절약 시책으로 자정이 되면서부터 꺼져있었다. 버스는 아직 다니지 않는 것 같아서 우선 택시를 불러 타고 여의도 쪽으로 달려가는데,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흰 옷을 입고 하나둘씩 나오는 여신도들의 어렴풋한 모습들이 눈앞을 지나가는데 마치 숲속에서 요정들...

해외동포가 설 자리 1989

북녘을 방문하고 1989년 10월 조국평화협회 총무 김성준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나의 북조국 방문동기는 멀리 남조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옴으로서 비로소 남북을 하나로 인식하게 되는 해외동포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연유한다.   우리 민족이 외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의 아니게 짊어진 분단이라는 질곡을 탈피하기 위해서 정치적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북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함으로서 통일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해외동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방북을 준비하고 실천케 한 원동력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람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 나의 방북은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명예훼손과 신체적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갔던 민족통일에의 길을 나도 밟고 지나가는 용기를 주시고, 말로만 듣던 북조국을 편견없이 보게 해주기를 비는 기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떠나기 전전날 나의 방북계획을 알고 찾아온 배종섭신부와의 대화와 그의 강복기도는 나의 결심을 더욱 정당하게 굳혀주었다. 배신부는 미국사람이지만, 우리 한국사람 못지않은 분이다. 서울 김수환 추기경께 사제가 없는 북조국의 평양 장충성당에 임시 본당신부로 일하기를 허락해주기를 청원하고 회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질 때 배신부는 “북쪽에서 형제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빌어주었다.   멀고도 가까운 길   비행시간만 뉴욕-동경 14시간, 동경-북경 4시간 30분, 북경-평양 1시간 30분 도합 20시간이 걸렸다. 비행기 사정에 따라서 가며오며 북경에서 하루 이틀씩 묵어야 한다. 가까운 길을 멀리멀리 돌아서 갔다.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시간도 더 걸리고, 돈도 더 들었다.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느냐”는 표어가 목구멍으로 치민다. 서울서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국을 찾는 해외동포가 일본과 중국에 돈과 시간을 뿌려...

뉴욕 한인회의 대표성(2) 2011

김성준 (대뉴욕지구 보험재정협회 상임이사)   2년 전 치러진 31대 뉴욕 한인회 회장선거는 돌이켜 보건대, 중상모략, 유언비어, 권모술수, 매수, 매표, 등으로 얼룩진 선거였다. 의도적으로 편파 보도하는 언론, 앞에서 공명선거를 부르짖으면서 뒤에서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위선적 후보, 한국의 정치판을 빼닮은 것에 다름 아니었다. 어떤 해에는 경쟁자가 없어서 단독 입후보한 후보자가 무투표로 당선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세 후보의 과열경쟁으로 동원된 15,170명의 투표 참여자 수는 인위적으로 동원된 불특정 다수로서 사상 최다 숫자를 기록하였다. 선거결과는 후보자의 인품과 자질보다는 한인사회에 존재하는 지연, 학연, 혈연, 종교, 단체, 한국의 정치적 당파, 등을 총망라해서 누가 효과적인 조직과 동원을 관리하고 운영했는가에 따라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올해 실시된 32대 회장선거는 등록마감 전까지 두 후보가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서서히 경선열기가 피어오르는듯하다가 지난 선거에서 차점으로 석패한 한창연 씨가 단독 입후보하여 경선 없이 마무리되었다. 우리 동포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뉴욕 시장이나 뉴욕 주지사를 뽑는 것도 아닌데, 우리 한인사회의 우두머리(?)를 뽑기 위해서 매 후보마다 수 십 만 불씩 쓰면서 법석을 떨지 않게 되어 매우 다행이다. 자원봉사 직에 불과한 한인회장을 뽑는데 이런 형태의 선거는 이성적인 제정신으로 하는 선거라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돈으로 차라리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도모하는 유권자 쎈타, 미국 정계에 진출하는 한인 2세 정치인들을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2011년 3월 27일 만하탄 한인회관에서 25만 동포사회를 대표(?)하는 188명의 회원이 참석한 정기총회에서 187명의 동의를 얻어, 한창연 씨가 제 32대 뉴욕 한인회 회장으로 인준을 받고 5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다고 한다. 지난 2년간 와신상담한 한창연 씨에게 축하를 보내며 그의 선거...

뉴욕 한인회의 대표성 2011

김성준 (대뉴욕지구 보험재정협회 상임이사) 3월 27일 예정된 제 32대 뉴욕 한인회 회장 선거가 선거 마감일 2월 25일 오후 5시 단독 후보로 밝혀짐에 따라 “다행히” 경선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등록마감 전까지는 두 후보가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서서히 경선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동포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뉴욕 시장이나 뉴욕 주지사를 뽑는 것도 아닌데, 매 2년마다 우리 한인사회의 “우두머리(?)”를 뽑는데 수 십 만 불을 쓰면서 이리도 법석을 떨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선거는 이성적인 제정신으로 하는 선거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런 돈으로 차라리 한인 2세 정치인들을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자원봉사 직에 불과한 한인회장이 우리 동포들의 실질적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우리 자신들의 재정문제, 가정문제, 청소년선도문제, 노인복지문제, 장애자우대문제, 소상인 보호문제, 등등 우리 자신들의 문제를 얼마나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일까?....   돌이켜 보건대, 2년 전에 치러진 31대 회장 선거는 중상모략, 유언비어, 권모술수, 매수, 매표, 등으로 얼룩진 선거였다. 의도적으로 편파 보도하는 언론, 앞에서는 공명선거를 부르짖으면서 뒤에서는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위선적 후보, 한국의 정치판을 빼닮은 것에 다름 아니었다. 어떤 해에는 경쟁자가 없어서 단독 입후보한 후보자가 무투표로 당선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세 후보의 과열경쟁으로 동원된 15,170명의 투표 참여자 수는 인위적으로 동원된 불특정 다수로서 사상 최다 숫자를 기록하였다. 선거결과는 후보자의 인품과 자질보다는 한인사회에 존재하는 지연, 학연, 혈연, 종교, 단체, 한국의 정치적 당파, 등을 총망라해서 누가 효과적인 조직과 동원을 관리하고 운영했는가에 따라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 법은 선거비용을 모금하고 사용하는데 투명성을 요구하는데, 지난 선거에서 각 후보들이 ...

뉴욕 한인회 창립 50주년에 즈음하여 2010

김성준 (평화통일 자문위원)   뉴욕 한인회가 “제 50주년 뉴욕 한인의 밤 및 미주 한인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2010년 1월 13일 매해튼 메리엇 마퀴스 호텔에서 성공리에 개최하였다. 참석인원 1100명에 데이빗 패터슨 뉴욕 주지사, 척 슈머 뉴욕 주 상원의원, 등 거물 정치인들까지 참석하였다는 보도는 주최 측의 탁월한 동원능력을 돋보이게 한다. 그런 능력이 우리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과 직결되기를 기대하며, 뉴욕 한인회의 건투를 빈다.   한편 뉴욕과 뉴져지의 한인사회를 무대로 활약하는 수많은 지역 직능 단체들의 참여가 미흡했다는 보도는 대 뉴욕지구 한인사회의 대표기구라고 주장하는 뉴욕 한인회의 구조적 한계와 매 2년마다 고질적으로 대두되는 회장선거 제도의 불합리성을 떠올리게 하는 바, 뉴욕 한인회 창립 50주년에 즈음하여 뉴욕 한인회가 당면한 과제를 동포사회의 지도자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한다.   뉴욕 한인회는 50년 전 불과 수백 명의 유학생 및 지상사 직원들의 친목단체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때는 한인회밖에 이렇다 할 단체가 없었으므로 명실 공히 한인사회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었고, 한인인구가 수천이 될 때까지도 불특정 다수투표로 뽑는 회장선거제도가 별 문제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한인사회는 지난 50년 또는 30년 전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다양성의 소수민족 공동체로 성장 발전하여 그 때 만들어진 뉴욕 한인회의 회칙은 그간 여러 차례 짜깁기를 하였지만 이제 어릴 때 입던 옷이 어른이 된 때 맞지 않는 것처럼 옹색한 유물이 되어버렸다.   오늘 날 뉴욕과 뉴 져지에 거주하는 한인인구는 공식적으로 약 25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그 두 배가 되는 5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것 같다. 여하 간에 필자가 이민 온 30여 년 전에 비하면, 대 뉴욕지구 한인사회는 인구는 10배 이상, 경제력은 100배 이상 성장했다고 추정된...

뉴욕 한인회 선거 소감 2009

김성준(평화통일 뉴욕 협의회 자문위원)   이번 선거는 특히 중상모략, 유언비어, 권모술수, 매수, 매표, 등으로 얼룩진 선거였다. 방송사의 편파적 방송, 언론의 자기중심적 보도, 앞에서는 공명선거를 부르짖으면서 뒤에서는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위선적 후보, 한국의 정치판을 빼닮은 것에 다름 아니었다. 어떤 해에는 경쟁자가 없어서 단독 입후보한 후보자가 무투표로 당선된 적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세 후보의 과열경쟁으로 동원된 투표 참여자 15,170명이 인위적으로 동원된 불특정 다수로서 사상 최다 숫자라고 하는 것밖에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선거결과는 후보자의 인품과 자질보다는 동포사회에 존재하는 지연, 학연, 혈연, 종교, 단체, 한국의 정치적 당파, 등을 총망라해서 누가 효과적인 조직과 동원을 관리하고 운영했는가에 따라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닌 것 같다. 미국 법은 선거비용을 모금하고 사용하는데 투명성을 요구하는데, 이번 각 후보들이 쓴 선거비용을 법적으로 조사라도 할 수 있다면, 부끄럽고 곤란한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수 십 만 불이 거래되는 뉴욕 한인회 선거에 언젠가 미국정부의 눈초리가 쏠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뉴욕 한인회가 우리 동포들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기에 매 2년마다 우리 동포사회가 이리도 법석을 떨어야 하는 지 동포사회의 지도자들의 반성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동포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뉴욕 시장이나 뉴욕 주지사를 뽑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수 십 만 불을 들여서 차지한 한인회장이라는 자원 봉사 직이 우리들의 문제(재정문제, 가정문제, 청소년선도문제, 노인복지문제, 장애자우대문제, 소상인 보호문제, 등등)를 얼마나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것인가? ....   나는 인위적으로 동원된 불특정 다수에 의한 선거방식을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에 의한 선거방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한인회의 구조를 동포사회의 실세로 활략하는 수많은 단체들의 대의...

"대표한다"는 말

5월 9일 금요일 저녁 코리아 빌리지 대동연회장에서 뉴욕일보 창간 5주년 기념회가 열렸다. 5년 전 주간지로 뉴욕 동포사회에 출현한 “뉴욕 뉴스”가 그간 “뉴욕 일보”라는 일간지로 전환하여 동포사회에 기득권을 누리는 주요 일간지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미주 동포사회의 순수 일간지로 자리 매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창간 5주년을 축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뉴욕일보가 언론다운 언론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여러 동포들과 동포사회의 지도자라고 할 만한 분들이 성황을 이루어 초대받은 한 사람으로서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분들이 단상에 올라가서 축사를 하였는데, 그 분들은 대개 어느 지역을 대표한다고 하는 분들이었다. 뉴욕 한인회 회장, 평통 뉴욕협의회 회장, 뉴욕 지역한인회 연합회 의장, 뉴져지 한인회 연합회 의장, 미주 한인회 연합회 의장, 등 여러분들이 단상에 올라가서 축하인사를 하였다.   축사를 한 여러분 가운데 특히 뉴욕 한인회 회장은 “50만 동포를 대신하여” 축하인사를 하였고, 뉴져지 한인회 연합회 의장은 “뉴져지에 거주하는 20만 동포를 대신하여” 축하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 “대신한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 분들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50만과 20만의 대표로 뽑힌 것일까?... 과연 우리 동포사회를 그런 식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나 하는 것인가?... 동포사회의 인식과 그 분들의 인식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 같다.   지금 한국에서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이명박정부가 근자에 미국과 체결한 불공정한 수입협정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하다. 서울 청계천에서 진행되고 있는 촛불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 국민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광우병에 노출된 쇠고기가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그에 대한 검역대책이 허술한 쇠고기 수입협정을 반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가운데 느닷없이 뉴욕 한인회가 대 뉴욕지구의 ...

뉴욕 한인회의 숙제

김성준(평통자문회의 뉴욕협의회 위원)   요란스럽게 시작된 제 30 대 뉴욕 한인회 회장선거가 싱겁게 막을 내렸다. 세 후보자가 나와서 오랜(6년)만에 경선이 되기는 했지만, 우리 동포사회가 이 부질없는 선거에 쏟은 비용과 시간과 정력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은 것 같다. 나의 추산에 의하면, 이번 선거에 세 후보자가 쓴 비용은 최소한 30만 불 이상이 되는데, 이 것은 지난 달 클린턴 대통령이 코리아 빌리지에 와서 모금한 액수보다 두 배 정도 많은 금액이 아닌가 한다. 당선된 사람은 그래도 기분이 좋겠지만, 낙선한 두 사람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10만 불이 아깝지 않을까?... 뉴욕 한인회 회장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쓸 가치가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정부를 상징하는 영사관이 인정해 주니까?.... 그렇다고 동포사회도 인정해 주는 것일까?....   나는 뉴욕 한인회의 회장을 뽑는데 있어서 동포사회의 돈과 시간과 정력을 부질없이 낭비해야하는 불특정 다수를 인위적으로 동원해서 회장을 뽑는 직접선거제도를 동포사회의 실세들의 대의원들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사회가 회장을 뽑는 간접선거제도(대의원 선거제도)로 바꾸자고 여러 차례 지상을 통해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에서 나는 실세들의 대의원들의 모임이 될 이사회가 회장을 뽑게 되면, 우선 선거비용이 들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식견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의 등장이 가능하고, 동포사회의 실세들의 대의원들이 권력의 핵심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여러 단체들의 역량을 자연스럽게 통합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왔다. 그래서 뉴욕 한인회의 구조 조정 또는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를 해왔다.   뉴욕 한인회의 대표성은 국제사회의 정치무대라 할 수 있는 뉴욕 시를 중심으로 그에 인접한 뉴져지 및 코네티컷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들의 미국 정계와 주류사회에 대한 대표성으로 생각되어왔는데, 이 번 선거를 통해 그 대표성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