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포가 설 자리 1989

북녘을 방문하고 1989년 10월
조국평화협회 총무 김성준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나의 북조국 방문동기는 멀리 남조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옴으로서 비로소 남북을 하나로 인식하게 되는 해외동포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연유한다.
 
우리 민족이 외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의 아니게 짊어진 분단이라는 질곡을 탈피하기 위해서 정치적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북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함으로서 통일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해외동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방북을 준비하고 실천케 한 원동력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람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 나의 방북은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명예훼손과 신체적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갔던 민족통일에의 길을 나도 밟고 지나가는 용기를 주시고, 말로만 듣던 북조국을 편견없이 보게 해주기를 비는 기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떠나기 전전날 나의 방북계획을 알고 찾아온 배종섭신부와의 대화와 그의 강복기도는 나의 결심을 더욱 정당하게 굳혀주었다. 배신부는 미국사람이지만, 우리 한국사람 못지않은 분이다. 서울 김수환 추기경께 사제가 없는 북조국의 평양 장충성당에 임시 본당신부로 일하기를 허락해주기를 청원하고 회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질 때 배신부는 “북쪽에서 형제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빌어주었다.
 
멀고도 가까운 길
 
비행시간만 뉴욕-동경 14시간, 동경-북경 4시간 30분, 북경-평양 1시간 30분 도합 20시간이 걸렸다. 비행기 사정에 따라서 가며오며 북경에서 하루 이틀씩 묵어야 한다. 가까운 길을 멀리멀리 돌아서 갔다.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시간도 더 걸리고, 돈도 더 들었다.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느냐”는 표어가 목구멍으로 치민다. 서울서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국을 찾는 해외동포가 일본과 중국에 돈과 시간을 뿌려야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고 분하다.
 
북한체류 열이틀동안 평양 원산 명사십리 금강산 삼일포 해금강 개성 선죽교 판문점 순천비날론 공장 등을 돌며 연일 릴레이 경주를 하는 사람처럼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동안 만났던 친절하고 소박한 인정미, 우리와 똑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술과 음식을 서로 권하는 우리 고유의 풍습, 자동차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숙한 우리 민속민요-북한에 와있다는 생각을 잊고 지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과 북이 정치적 이념과 체제가 서로 다를 뿐 우리 민중들은 서로 다를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 새삼스러웠다. 40여 년간의 단절과 여과되어 조작된 정보로 인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양 믿고 있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건설은 평화의 전제
 
과연 북한이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가? 내 눈에는 한낱 흑색선전에 불과하였다. 44년 전 골육상쟁의 잿더미 위에 이룩한 괄목할만한 건설과 지금도 도처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건설공사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건설은 평화를 전제한다고 말하면 지나친 역설일까?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 건설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도로가 머지않은 장래에 서울과 평양을 잇는 평화의 대로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은 지금도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는가?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에 의하면 적화통일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다.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통일은 북한 동포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었다. 임수경 학생이 던진 파문과 충격은 남쪽에서 보다 북쪽에 더 큰 것 같았다. 북쪽에서는 임수경 학생으로 인해서 남쪽 민중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녀가 보여준 자유 발랄함과 두려움 없는 신념에 대해 배운 점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는 자조 섞인 변명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정녕 통일을 원한다면 각자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교수의 사회주의 인식
 
주체사상 연구소 이교수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이교수가 설명하는 주체사상은 집단의 이익(공동선)과 개인의 창발성(인권)을 더불어 존중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가톨릭의 사회교시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북한사회가 주체사상의 이념대로 집단의 이익에 비해서 개인의 창발성이 균형 있게 존중되고 있는가 하는 실천적 문제는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임을 이교수도 인식하고 있었다.
 
요즘 대두되고 있는 사회주의 붕괴 설에 대한 이교수의 설명은 자유민주주의 3백년 역사에 비해 사회주의 역사는 불과 1백년밖에 되지 않지 않느냐,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결론을 내리기는 시기상조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와해현상은 사회주의 자체의 결점보다는 실천과정의 실패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신념의 쇠퇴 결과로 풀이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한 지성인을 통해서 북한은 자신의 문제들을 스스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북한 폐쇄성의 허구
 
북한 체류기간동안 도처에서 소련, 중국, 동구권, 아랍 및 아프리카 권에서 온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폐쇄성이란 말은 상대적으로 적용된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류는 남한의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와 대등한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찾아온 사람이 적은 것은 남한에 사회주의 국가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것과 같다. 어쨌든 북한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방의 문을 점차적으로 더 크게 열기를 바라고, 그러나 조심스럽게 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충성당에서의 기도
 
북조국을 떠나기 전날이 마침 일요일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하는 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가 끝난 후 지난 4월 27일 뉴욕 한성교회에서 환영예배를 함께 드렸던 조선 기독자 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고기준목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 뉴욕동포들의 이름으로 준 선물 중 미처 가지고 가지 못한 것(성찬기 셋, 성경, 찬송가, 등)을 회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해주었다. 그리고 미국 서부와 일본에서 온 동포 일행이 회중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봉수교회 예배 후 장충성당에 잠시 들렀다. 사제가 아직 없어서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평신도들이 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회가 평신도들에 의해서 목자 없이 1백 여 년을 박해를 받으며 지탱해야 했던 비장한 역사를 상기시켰다. 문규현 신부가 “40여 년 동안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을 들어주신 하느님의 섭리가 기묘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말이 실감났다.
 
우리 감각으로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을지라도 하느님의 섭리를 굳게 믿고, 우리의 선입견을 북한의 교회를 비판하는데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잠시 무릎을 꿇고 봉수교회에서 드렸던 바와 같은 “이분들이 이 땅에 신앙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불씨가 되게 하시기를 비는” 맘속기도를 바쳤다.
 
자력의 한계와 자부심
 
북한에서는 한반도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잿더미 위에 괄목할만한 건설을 이룩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격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수긍이 갔다. 그러나 인민들의 생활 향상을 목표로 건설 중인 순천의 비날론 공장도 순전히 자력으로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가 지구촌으로 불리는 이 시대에 북한은 인류가 이루어 놓은 업적(연구결과)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번에 가본 곳 만해도 질서정연하고 조화를 잘 이룬 평양시를 비롯한 원산, 명사십리, 금강산, 만물상, 구룡연, 온천, 해금강, 삼일포, 판문점, 개성, 등 얼마나 많은 관광자원이 벌어야 할 돈을 안 벌고 누워 자고 있었다. 평양의 대동강을 한양(서울)상인에게 팔아 먹었다는 전설의 인물 봉이 김선달 같은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으며 남북이 서로 등지고 살아야 하는가?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정치의 철칙대로 바야흐로 세계가 각자 눈앞의 이익에 따라서 과거의 적이 오늘의 우방이 되는 이때, 우리 남북은 명분과 실제 양면에서 모두 민족회생의 절호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북경에서 만난 어느 남한 동포의 말처럼 “잘못된 한국의 반공교육”은 시정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정보에 너무 어두운 해외동포들”은 눈을 크게 뜨고 남북의 교류에 촉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는 북경-동경 기상에서 옆 좌석에 앉았던 어는 재미동포 사업가의 말처럼 “중국이 대만과 홍콩의 자본과 기술에 힘입어 3-4년 이내에 세계시장의 판도를 바꿀 만큼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기왕이면 조국의 물건을 사주고 싶다. 같은 모양으로 남북이 협력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또 한 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남북은 당장 실현이 어려운 정치적 군사적 통일을 빙자하여 실제적인 민간교류 창구를 막아서는 안 된다. 풀기 어려운 것은 뒤로 미루더라도 민족 동질성과 민족 공동선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대화의 통로를 넓히고 교류를 확대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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