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봉사할 수 있는 힘 1988
불법체류자 사면신청 봉사를 마치고
퀸즈 한인 천주교회 사목회 사회복지분과 위원장
새남터 5호 1987 - 1988
믿음은 봉사할 수 있는 힘
"믿음은 밤에 무릎을 꿇고 그저 기도드리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그저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기다리는 무한한 영광을 그저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기쁨을 앗아가는 죄를 그저 미워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전력을 경주하는 노력, 과감한 모험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봉사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무엘 E. 키서
영주권이 없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조이며 사는 사람들이 소위 불법체류자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다행히 부모나 형제의 연줄로 이민온 사람들에게는 영주권이란 물이나 공기처럼 당연히 주어지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불법으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주권이란 타는 목마름에 물처럼 귀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사면 신청자들에 대한 변변치 못한 봉사를 마치면서 그간의 경위를 소감을 섞어가며 보고하는 식으로 써보고자 한다.
봉사한 사람들
우리 본당의 봉사 쎈타는 부르클린 교구청 이민봉사실(The Catholic Migration and Refugee Office) 산하 한 분실로서 사목회 사회복지분과 소관으로 본당 신부님의 적극적 지원과 청년회 및 레지오 마리애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로 설치 유지되었다.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지만 시종 자원 봉사자로 일한 사람은 김미원, 김성호. 김진석, 백영덕, 성미정, 이경희, 이대호, 이미영, 이정호, 이안나, 정구진, 정유경, 한기남, 등 13명이다.
봉사경과 및 사면의 실상
봉사 센타가 설립되자 대대적 홍보와 더불어 1987년 5월 20일 수요일 저녁 학교 강당을 빌어 첫 계몽의 밤을 실시했다. 그리고 5월 27일. 6월 17일, 6월 24일에도 역시 같은 장소와 시간에 계몽의 밤을 연달아 개최하였다. 계몽의 밤에서는 개정 사면법 시행 및 사면신청 절차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서식을 배포하였다. 6월 말부터는 계속 찾아오는 사람들의 상담과 신청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전교회관 지하실을 이용 매주 월요일 저녁에 봉사 센타를 열었다. 9월 중순부터 1988년 5월 4일 사면 시행이 만료될 때까지는 월요일과 목요일 양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봉사하였다. 1987년 5월 5일 초여름의 뜨거운 기대와 열기 속에 개시되었던 사면봉사는 1988년 5월 4일 사면시행의 만료와 함께 그리고 6월 23일 마지막 한 사람의 이민국 면접 통과를 끝으로 그 막을 내렸다.
한국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번 사면대상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일반사면(Legalization Program)으로 1981년 12월 31일 이전에 입국한 사람으로 1982년 1월 1일 이후 줄곧 불법체류한 사람이고, 또 하나는 농장 노동자 사면(Special Agricultural Workers Program)으로서 1983년 5월 1일부터 1986년 5월 1일까지 3년간 매년 90일 이상 줄곧 일한 사람 또는 1985년 5월 1일부터 1986년 5월 1일까지 1년간 90일 이상 일한 사람이다.
일반사면의 경우 입국한 날짜는 해당이 되는데 합법적으로 체류기간을 연장했던 사람, 며칠 날짜가 모자라는 사람 등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도 사면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농장사면의 경우 날짜와 기간이 미달되는 사람들은 물론, 아예 농장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걸고 많이 찾아왔지만 안타까운 마음 뿐 속수무책이었다. 대부분의 사면신청자들은 증빙서류를 만드는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여권을 분실하여 신분증명이 어려운 사람, 자주 옮겨 다닌 직장과 거주지를 일일이 증명할 수 없는 사람, 등 불법 떠돌이 신세로서 증빙서류를 만든다는 것은 여간 무리가 아니었다.
사면 시행기간 중 우리 봉사 센타를 찾은 사람은 수백 명에 달했으나 그중 오직 93명의 서류를 접수하여 부르클린 교구 이민 봉사실에 제출하였던 바 그중 8명이 심사에서 탈락되고 나머지 85명만이 이민국에 송부되었다. 사면이 되는 사람보다 안되는 사람 수가 훨씬 많았으며 어둠속에 자신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하면 사면을 받은 사람은 사면이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 사면 신청자의 대부분이 이미 임시 거주증을 받아 자유롭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으며, 늦게 서류을 접수한 사람들도 조만간 임시 거주증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임시 거주증을 받은 사람은 18개월이 경과한 후 영주권을 신청하게 된다.
가슴에 남는 사람들
74세 된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 이분은 73년도에 어느 한국 외교관의 가정부로 미국에 왔다. 얼마 후 외교관은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분은 그냥 남아서 많은 한국인 이민 가정을 전전하며 가정부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한국에 돌아가도 몸부칠 가족도 친지도 없는 분이었다. 다행히 이분에게 신세진 가정에서 동정을 받고 있어서 주거증명 재정증명 등을 쉽게 마련하여 사면을 신청할 수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래 사실지 모르지만 아직도 쉴새 없이 이집 저집 사정을 봐주며 살아가는 이 할머니가 7년 전 작고한 애 어머니를 연상케 해 주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32세 된 어느 젊은 남자의 이야기. 이분은 한국에서 매우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꿈을 가지고 무작정 미국에 온 사람이었다. 1981년도 4월 어느 날 갖은 수단을 써서 서울을 떠난 후 타이페이, 멕시코 시티를 거쳐 멕시코의 치와와라고 하는 곳에 도착, 여기서 밤에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의 산 디에고로 국경을 넘어온 것이 이분의 불법체류의 시작이었다. 뉴욕에 와서 돈을 벌기 위해 온갖 험한 일을 다 하며 때로는 마이애미에 내려가 몇 개월씩 원양어선을 타고 일도 하며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다. 여권도 분실하여 없고 신분증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전화도 아파트도 자기 이름으로 소유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운전면허증도 없고 차도 없었다. 사면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변호사를 찾아갔는데 해오라는 서류는 많은데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시간만 낭비하다가 귀국하려고 맘먹고 있었는데, 어떤 이의 권유로 우리 봉사 센타를 찾아오게 되었다.
면담을 하면서 신청서 작성을 하는데 가족들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 등을 척척 기억하고 있었다. 의아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하는가 물었다. 생일 때마다 늘 잊지 않고 송금을 하거나 선물을 보내곤 하여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분은 25세 때 결혼하자마자 한국을 떠났는데 지금 한국에 아직도 자기를 기다리는 처와 그 때 만든 어린 아들과 어머니와 여러 동생들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리웠을까.... 나는 이 사람에게서 모진 끈기와 자기에게 영주권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아직도 좌절하지 않는 투지를 엿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선원으로 마이애미에 정박중 도망하여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온 사람도 있었다. 이민국 수사관에 붙들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 출국명령을 받은 적이 3번이나 되는데도 계속 잠적하여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다. 이 사람은 신분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이는 미국에 오기 위해서 서류상 자기 처와 이혼하고 미국인 여자와 결혼한 사람도 있었다. 소위 위장 결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갖은 수단을 써서 자기 처자를 데려다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불법처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한
한결같이 불법체류자들은 불안과 초조속에 희망없는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실감되었다. 모든 서류가 완전하게 보이는데도 초조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서 이민국 면접 전날밤은 대개 뜬눈으로들 세웠다. 면접 당일에는 가승이 두근거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서류에 서명을 할 때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조이면서 살아 왔을까... 눈에 선하게 상상되었다. 봉사 센타를 닫으면서 느끼는 애석하고 아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무수히 많은 자격 미달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던 사실은 사면법 자체에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하였다. 그리고 미민국 면접이 일과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신청자들의 면접에 일일이 따라갈 수 없었던 점 또한 아쉽고 불충한 느낌을 주었다. 자원 봉사자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관계로 풀 타임 써비스를 할 수 없었던 점 또한 상담자 및 신청자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
지난 1년 동안 기대에 어긋난 성과, 불충하고 미흡한 봉사에 대해서 송구스러움을 느낄 뿐이며 일도 하면서 공부도 하면서 바쁘고 귀한 시간을 할애하여 추우나 더우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나와서 기꺼이 봉사에 임한 자원봉사자들의 신덕과 애덕에 대해 머리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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