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한국여행 2015
2006년 5월 평통 12기 연수차 노무현 정부기간동안 3번째(2003년 9월, 2004년 9월)한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이 마지막 한국여행’이려니 생각하며 맘속으로 “나를 반겨준 친구들이여 안녕, 대한민국이여 안녕!” 을 내 자신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한국에 부모형제도 없고 사업상 볼일도 없으니 가끔 가볼 수 있는 여건도 아니려니와 비행시간이 워낙 길어서 다시 가게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기동창들의 모임을 통해서 고등학고(서울) 졸업 50주년 재회모임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생각을 거듭함에 50년만의 통창생들의 재회모임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서, 함께 갈 아내에게 말하고 동기동창들에게 공공연하게 참석의지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출발 4개월 전(2015년 5월)에 비행기표도 구입해버렸다. 주위사람들에게 이번 여행이 나의 마지막 한국여행이 될 거라고 이야기하며...
여행일정 계획
50주년 기념행사는 9월 14일(월)부터 9월 18일(금)까지 4박 5일 동안 진행되었다. 9월 14일(월)은 참가동창 부부초청 골프, 9월 15일(화)은 낮에는 서대문구 신문로에 있는 경희궁(옛 교정이 있던 곳) 및 서초동으로 옮긴 현 교정을 돌아보고, 저녁에 세종호텔에서 전 참가 동창생 재회 총회, 9월 16일(수)부터 9월 18일(금)까지 2박3일 진주성, 촉석루, 대우조선, 학동, 신선대, 장사도,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 이순신대교,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등을 두루 돌아보는 관광일정으로 짜여있었다. 나는 대한항공으로 현지시간 9월 14일 오후 5시20분 인천공항에 도착하기로 되어있어, 첫날 부부초청골프는 참석할 수 없었으나 나머지 기간 동안 백발이 성성한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버린 옛 동창생들과 과연 ‘마지막 여행을’ 잘 왔다는 생각을 하며 허심탄회한 우정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었다.
집을 떠나기 전 나는 이 여행을 위해 꼭 만나야 할 친구 및 친척들과 이메일과 카톡으로 한국체류기간동안 일정을, 9월 13일(일) 출발하여 9월 30일(수) 돌아올 때까지, 하루도 빈틈없이 세밀하게 짰다. 이 여행은 3막으로 이루어졌다: 제1막은 50주년행사참석(3박4일), 제2막은 대전에 있는 한남대 명예교수 이강용 외국어대학 불어과 졸업동기(3박4일), 제3막은 뉴욕 한국외국어대학 동문회를 통해서 사귀고 나에게 등산을 가르쳐준 이문원(4박5일), 그리고 막간을 이용해서 친구 및 친척들을 만날 계획이었다.
9월 13일(일) 뉴욕 출발
JFK 공항에서 오후 2시 출발 인천공항까지 가는 대한항공 KE 0082을 타기 위해 오전 11시 집을 나섰다. 외국어대학 동문이며 이웃에 사는 성기복이 우리(나와 아내)를 공항에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일찍이 Check-in 하고 출발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2시 우리가 탄 비행기는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전화기는 Wi-Fi를 제외하고 모든 기능을 꺼버렸다. 우리 좌석은 객실 우측 3자리가운데 44H 44K로 가운데 자리가 비어서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편하게 갈 수 있었는데,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로, 하필 날개위에 창문이 나있어 밖을 시원하게 내다볼 수 없는 게 불만이었다.
9월 14일(월) 인천 도착
지루한 비행(비행시간 14시간 20분) 끝에 현지시간 9월 14일(월) 오후 5시20분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미국여권(외국인)이라 입국심사 줄이 매우 길었다. 줄서서 움직이는 동안 뉴욕에서 같은 비행기로 출발한 뉴욕 동포사회 어른 김영덕 선생과 정철응 외대 선배를 만났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가니 파주에 사는 처남(이재실)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일산에 살던 처남이 은퇴하고 빚을 청산하고 옮겨간 곳이 파주란다. 휴전선 바로 밑이라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때면 불안한 곳 가운데 하나인데 요즘은 북한의 도발적 언동에 익숙해진 터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군 초소가 군데군데 세워져 있고 철조망이 쳐있는 임진강변을 따라 나있는 도로를 달리는데 “통일을 대비하는 희망의 도시 파주” 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처남내외는 공기 맑은 파주의 값싸고 깨끗한 13층짜리 호텔수준의 2 베드룸 아파트에서 불편 없이 살고 있었다. 파주는 서울시내까지 나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우리에게 불편했지만 생전처음 가본 곳이라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체험을 선물로 주었다.
한국의 아파트들이 미국의 호텔 수준이긴 한데 화장실이 매우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이 미국처럼 샤워실 또는 욕조와 구분되지 않은 관계로 화장실을 드나들 때마다 슬리퍼를 신지 않으면 발바닥에 물을 묻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점은 리조트 콘도나 호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샤워실 또는 욕조에서 쓰는 미국식 큰 타월 대신에 크기가 작은 개인 수건을 사용하는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또한 아파트나 호텔 어디서나 일본처럼 변기에 비데가 설치되어있는 점이 특이했다. 또한 식탁에서 쓰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은 냅킨, 자동으로 켜지고 꺼지는 전등 장치, 등 물자를 아끼는 근검절약 정신이 실생활에 응용되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불필요하게 커서 헤픈 냅킨, 대낮에도 켜있는 전등, 불필요하게 커다란 타월, 등에 익숙한 필자는 미국에서도 이런 근검절약 정신이 실생활에 적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 일본여행 때 보고 느낀 것 - 근검절약 정신 - 을 이번 한국여행에서 다시 보고 느끼는 듯했다.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이지만 좋은 점은 빨리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9월 15일(화) 경희궁, 서울고 교정, 세종호텔, 강남 뉴 힐톱호텔
고교 동창생들은 오후 1시 경희궁 앞에서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서둘러서 앞으로 3박4일을 소화시킬 여행 가방을 싸들고 문산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서 내렸다. 뉴욕의 산이좋아(http://cafe.daum.net/sanijoaUSA) 등산모임 회원 가운데 광화문에 사무실을 가진 김호용씨가 불과 2주전에 귀국하면서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고 해서 광화문역에서 내리자마자 공중전화로 연락했더니 15분도 안되어 우리가 서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광화문에서 신문로 쪽으로 난 골목길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그 사무실에 가서 그가 손수 큰 컵에 진하게 뽑은 미국식 커피를 한잔씩 마셨다. 뉴욕에서 산에서만 만나다가 서울 거리에서 만나니 복장도 다르고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여행 가방을 끌고 새문안 교회를 지나 옛 교문이었던 새로 복원된 경희궁 정문으로 걸어갔다. 정문안으로 들어서니 벌써 많은 동창생들이 도착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옛 교정은 온데 간 데 없지만 우리가 50여 년 전 3년 동안 공부하며 꿈을 키우던 구석구석을 회고하며 복원된 경희궁을 돌아보았다. 일본이 감히 우리 민족을 경멸하여 조선왕조의 경희궁을 헐고 학교를 세운 것이었지만 그 학교를 나온 우리들은 경희궁의 왕자나 되는 것처럼 자긍심을 가지고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경희궁을 돌아보고 관광버스로 서울역 앞을 지나 강남 서초구에 있는 현 서울고 교정으로 가는데, 일제가 지었던 옛 서울역 역사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고, 바로 왼쪽으로 세워진 새로운 서울역 역사를 지나가면서 버스 창밖으로 볼 수 있었다. 서울고 교정에 들어서자 “언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표어가 눈에 뜨이고, 교장, 부교장, 학생처장, 동문회장 및 교실 창문을 통해서 학생들이 우리 일행을 환영해주었다. 6.25 참전 기념비, 고 강재구 소령 흉상, 한국의 슈바이쳐 고 선우경식 원장 흉상, 고 김원규 초대 교장 흉상, 등을 돌아보고 저녁 6시경 세종호텔에 도착하였다. 세종호텔 3층에 마련된 회의실에 들어서니 벌써 도착한 동창생들로 왁자지껄하였다. “야, 성준아 오랜만이다!” 대부분 졸업 후 실로 50년 만에 만나는 동창생들이었다. 뉴욕 동기동창 모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뉴욕에서 살다 최근 귀국한 박성완 부부와 뉴욕에서 등산도중 산에서 종종 마주치던 홍광표가 부인과 함께 깜짝 나타나서 뉴욕지구 외톨이 참석자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기념식만 참석하는 동창생이 11명(부부동반 21명), 함께 여행할 동창생이 107명(부부동반 183명 - 6대 버스에 분승), 이 가운데 해외 동창생들이 18명(부부동반 34명)으로 국내 큰손들과 개미군단의 찬조금으로 해외 동창생들은 전 행사를 통해 무료로 대접을 받았다. 빈틈없는 계획과 진행으로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임원들에게 그리고 찬조금을 낸 동창생들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재회 총회(1부 식순 및 2부 여흥)가 밤 9시경 끝나자 함께 여행할 동창생들은 다음 날 아침 7시 강남 현대백화점 주차장에 집합하기로 하고, 닥치는 동창생들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각자 숙소로 뿔뿔이 헤어졌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뉴욕에서 살다간 외대동문 이광호씨가 현대백화점 주차장에서 가까운 곳에 잡아놓은 강남 논현동 뉴 힐톱 호텔로 갔다. 밤 10시경인데 이광호씨가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밤인지라 다음 날 아침 5시경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9월 16일(수) 진주성, 촉석루, 통영 달아공원 및 이순신 공원, 대명 거제콘도, 합동칠순잔치
이른 아침 5시경 Check-out 하자마자 이광호씨가 호텔 로비에 웃으며 나타났다. 멋있는 검은색 현대 에쿠스 승용차로 그가 가끔 가는 영동 설렁탕집으로 데려가서 막걸리에 설렁탕을 먹고 삼성동에 자기 오피스 건물과 박근혜 대통령이 살던 집, 등을 둘러보고 7시경 현대백화점 주차장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주차장에는 6대의 버스가 대기하고 벌써 많은 동창생들이 속속 집합하고 있었다. 우리는 3호차(호차 반장 김영식)에 탑승하였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7시 30분경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진주에 도착했을 때 12시경이었다. 진주 갑을식당에서 진주비빔밥을 먹고 진주성에 입장하여 쌍충사적비, 촉석루, 호국종각, 진주성 임진대첩 기념제단, 등 역사적 문화재들을 관람하고, 다시 통영으로 이동하여 달아공원 전망대에 올라가 한려해상공원의 수채화 병풍처럼 둘러선 섬들을 관망하고 저녁 6시경 우리가 이틀간 묵을 대명 거제콘도에 도착하였다. 콘도 입구에 들어서니 바다가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유리창 틀이 마치 커리비언의 거대한 고급 리조트를 연상시켰다. 우리 방은 커튼을 젖히니 바다가 훤히 보이는 10층에 있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대충 짐을 풀고 지하 연회장으로 내려가니 맛있는 갖가지 음식(육해공)의 저녁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가자 합동칠순잔치, 함께 온 동창생 부인의 창, 가라오께, 초청 직업가수, 등으로 밤 10시가 지나도록 여흥시간이 이어졌다.
3호차에 함께 탄 동창생들
진주성 입구
진주성 임진대첩 기념제단 앞에서
달아공원 전망대 입구
달아공원 전망대에서 본 한려수도
대명 거제콘도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
대명 거제콘도 지하 연회장
합동 칠순잔치
동창생 부인의 창 공연
미지의 섬 장사도 야외 공연장
별에서 온 그대 촬영장소 선전 포스타
장사도 연락선
신선대(남해 해금강) 전망대
대우 조선소
대우 에드미럴 호텔 연회장에서
조선수군통제영 세병관
세병관 골목길
이순신 대교
순천만 공원 꼬막정식
순천만 공원 갈대밭
서울 지하철
서울 지하철 화장실 입구
9월 17일(목) 신선대(해금강), 거제도 남부 저구항, 장사도, 대우조선 산업시찰, 대우 에드미럴호텔 만찬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 45분경 대명 거제콘도를 출발하여 경치 좋은 거제해안도로를 따라 거제도 남부 저구항에 도착하여 9시 45분경 연락선을 타고 미지의 섬 장사도로 건너갔다. 해상공원으로 꾸며진 장사도는 ‘별에서 온 그대’라는 영화 촬영장소로 유명해진 곳이다. 장사도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3시간 정도) 각종 희귀식물, 조각상, 야외 공연장, 등을 볼 수 있었고 곳곳에 휴식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다시 연락선을 타고 육지로 건너와 남해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신선대에서 점심을 먹고, 걸어서 신선대 전망대까지 올라가 주위를 관망하고 내려와서, 오후 3시반경 대우조선으로 이동하여 버스를 타고 조선소 내부를 관람하였다. 2006년 5월 12기 평통 회의에 참석차 왔을 때 현대조선소를 방문하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대우조선소를 방문하고 대한민국의 조선산업의 규모와 기술에 새삼 다시 한 번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한민국에 현대 삼성 대우 3개 조선소가 있는데 서로 기술, 경험 및 판매를 국가 전략적으로 공유하지 못하고 있어 세계적 수준의 막강한 저력에도 불구하고 새로 부상하는 중국에 밀리고 있다는 김국호(서울공대 조선공학도, 해군 OCS 장교, 대우조선 부사장 역임) 동창생의 설명이었다. 대우조선 시찰을 마치고 6시경 대우 에드미럴 호텔에 마련된 식당에서 고급 뷔페 음식(육해공)을 즐기며 동창생 및 배우자들의 자청노래자랑이 벌어져서 흥겨운 시간을 보내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우리 숙소 대명 거제콘도로 돌아왔다.
9월 18일(금)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세병관), 이순신 대교,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아침 일찍 지하 식당에서 아침을 들고 이틀간 묵은 방을 Check-out 하고 9시경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세병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왜적에 대비하는 수군의 총본부로서 오늘날의 해군사령부와 같은 곳이었다. 왜적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을 살린 민족의 영웅 이순신장군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 세병관을 돌아보고 이순신 대교를 건너 순천만에 도착한 때는 오후 1시쯤 되었다. 이곳에서 점심으로 순천만 꼬막정식을 들고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을 관람하였다. 갈대밭 위로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드워크를 따라 갈대밭 위를 걸으며 가을의 따가운 뙤약볕과 산들바람과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서로 이야기하며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등산하이킹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버스 앞 광장에서 언제 다시 만나볼지 모르는 동창생들 간의 석별의 정을 나누는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나도 버스마다 올라가서 “건강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게!” 소리치고 돌아와서 우리 3호차 버스에 오르니 함께 온 동창생들이 이미 앉아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 3시반경 순천만을 출발한 우리가 탄 버스는 저녁 9시경 서울에 도착했다. 강남 양재 4거리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까지 가서 광화문에서 문산가는 시외버스 막차를 타고 문산에 도착해서 파주 처남 집에 들어갔을 때는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9월 19일(토)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 사촌형 내외
뉴욕을 떠나오기 전에 미리 계획한대로 오늘 하루는 샤핑도 하고 친척가운데 한분을 만날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집사람 전화기에 설치한 서울지하철 지도를 보고 이제 제법 지하철 타는 게 익숙해졌다. 미국에서 한국 갔다 오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에 가면 등산복을 싸게 살 수 있다 해서 우리도 무작정 두 시장을 찾아갔다. 특별히 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없었지만 구경삼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나는 등산복 여름 바지 2개와 바람막이 자켓 1개를 사고 집사람은 여름 바지 2개를 샀다. 값이 달라로 환산하면 엄청 싸게 느껴졌다. 명품이 아닐 뿐이지 잘 만들어진 등산복들이었다. 바지 1개에 1만원 내지 1만 5천원, 바람막이 자켓이 1만 5천원이었는데 달러로 9불 내지 13불 밖에. 미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싼 가격이다.
저녁 6시 약속장소 마포구 합정역 8번 출구로 갔다. 4촌형(김의종) 내외가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형님은 내가 한국에 올 때마다 저녁을 사주고 헤어질 때면 용돈까지 주머니에 넣어주시는 분이다. 얼마 전 한국 갔다 온 사람의 장어구이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어구이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형수님이 인터넷에서 찾아낸 근처에 잘한다는 풍천 장어구이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근 10년 만에 미국에 사는 가족근황 이야기하며 장어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성격이 화끈한 형수님(목동 마리아)이 노래방도 가자고 해서 우리는 근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며 기분 내며 놀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을 이야기할 때 밤이 무르익어 문산가는 막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깨끗한 지하철, 질서 있게 줄 서기하는 시민들의 모습, 곳곳에 있는 깨끗한 화장실, 화장실 입구에 전신을 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 화장실에서 나와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모습을 정리하는 젊은 아가씨들, 곳곳에 붙어있는 긍정적 표어(소원을 말해봐! 행복미소! 따위), 등 세계적 도시라고 하는 길거리에 쓰레기가 여기저기 뒹굴고 지저분한 뉴욕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2012년 일본여행에서 보았던 모습을 다시 보는 듯 했다.
9월 20일(일) 어린왕자 조병욱 선배, 대전 한남대 명예교수 이강용
오늘은 대전에 거주하는 외대 동창 이강용 교수가 우리와 2박 3일 여행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오후 4시 5분 강남버스터미널에서 대전으로 떠나는 버스표를 예약하고, 그 전에 대학시절 2년간 자취를 함께하며 지냈던 조병욱 선배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 선배는 대학시절 생떽쥐뻬리의 어린왕자를 소재로 학위논문을 쓴다고 자취를 같이하는 나와 많은 대화와 술자리를 함께했던,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선배로서 오늘날 까지도 어린왕자의 가치관을 실천하며 사는 멋있는 사람이다. 오전 11시경 청담역 2번 출구에서 만나서 근처 커피샵에서 쬐끄만 컵에 담아주는 비싼 커피 한 잔(5천원=4달라 50센트)씩 들고, 근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으며 주로 그의 이론적으로 정리된 삶 - 미쳐서 산 지난 30년간의 삶 - 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소재가 풍부한 사람이라 옆에서 경청하는 집사람도 흥미진진해했다. 미쳐서 산 그의 30년간의 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10년은 포항제철 비서실근무시절, 두 번째 10년은 포항제철에서 경영진이 바뀌면서 퇴직한 후 등산에 심취해 살던 시절, 세 번째 10년은 클래식 음악에 심취해 사는 10년이라고. 그는 나에게 “미국서 마누라와 함께 등산을 다닌다는 자네가 한국의 명산을 함께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나와 겨우 점심이나 먹자고 하느냐”고 힐난을 해서 깜짝 놀랐지만, 미국을 떠나오기 전 이미 계획된 일정을 바꿀 수가 없어서 이 번 여행의 제 3막으로 예정된 9월 24일(목) - 9월 28일(월) 설악산 등산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으나, 자기 일정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늘 점심회동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9월 26일(토)에는 요즘 심취한 클래식 음악 감상회에서 해설을 해야 하고, 9월 27일(일)에는 두 아들이 추석날 찾아오기 때문에 서울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양반은 스마트폰을 불필요하게 여겨 오래된 셀폰을 가지고 다니므로 가톡이 안 되고 이메일을 해도 대답이 1-2주 걸리니 사전에 의향을 탐색할 수 없어서 그리 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추석전후 귀성객들로 인해 전국토가 주차장이라는 말을 듣고 ‘그 교통체증을 피해서 설악산에 갔다 온다’고 머리를 쓴 결과가 우리 여행의 제 3막이었다.
여하 간에 그의 미쳐서 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는 동안 점심회동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는 4시 5분 출발 대전행 버스를 따기 위해 떠나는 강남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우리를 바래다주었다. 이 어린왕자를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차창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찡하는 아쉬움이 이심전심 전달되었다! 2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대전에 도착하자 친구 이강용 부부와 그 두 아들이 고속버스 정거장에 차를 세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그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그가 18년간 살고 있는 아파트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그 집에서 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와있어 근처 호텔에 방을 잡아놨다고 해서 뜻밖에 친구가 마련해준 호텔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9월 21일(월) 봉하마을, 부산 해운대, 국제시장, 용두산, 자갈치시장
아침 일찍 호텔 안에 있는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가방을 싸들고 오전 9시경 호텔 로비로 나갔다. 두 아들 가운데 사진전문가(Photographer)인 큰 아들 준이 앞으로 2박3일 자기 차로 우리를 모시겠다고 호텔 앞에 차를 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두 부부는 그 차를 타고 부산가는 길목에 있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무덤과 기념관이 있는 봉하마을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준이는 대구를 경유하는 경부고속도로 아래쪽으로 새로 난 고속도를 타고 가다가 관광명소로 알려진 금강 휴게소에 일부러 세워서 우리들로 하여금 기념사진을 찍도록 했다. 이곳에서 결혼식 사진을 가끔 찍어본 모양이었다. 정오경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생가, 무덤, 기념관, 등을 돌아보고 노사모 부녀회가 경영한다는 테마식당에서 점심을 들면서 상업용 김해막걸리(2천원)보다 더 비싼 봉하쌀로 빚었다는 봉하막걸리(3천5백원)를 시켜마셨다. 이번 여행에서 봉하마을 참배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취한 최후의 선택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그가 추구한 국민적 이상과 가치는 앞으로 누군가 추구하고 성취해야할 것으로 믿는 까닭이었다.
봉하마을에서 부산까지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른 오후 우리는 이 교수 부인이 잡아놓은 해운대 해수욕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하나콘도에 Check-in 하고, 밖으로 나와서 성수기 여름철이 지나 인적이 한산해진 해운대 해수욕장을 끼고 도는 영화의 거리를 서로 이야기하며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가을 오후 햇볕은 따갑고 바닷물은 잔잔하고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영화의 거리는 평화스러웠다. 우뚝우뚝 하늘로 치솟은 바닷가의 고층 콘도 빌딩들은 그야말로 국제시장 영화에 나오는 1950년대와 비교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우후죽순처럼 우뚝우뚝 하늘로 치솟은 아파트 건물 숲을 바라보면 좁은 땅에 퍼져나갈 곳은 하늘밖에, 과연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영도다리를 건너 용두산, 광복동,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등이 있는 구시가지로 갔다. 우선 그 근처에서 제일 높고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있는 용두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광복동 거리와 국제시장 안을 서성거리다가 해가 저물어 갈 때 우리는 부산의 수산시장 인 자갈치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전복 해삼 멍게 게불 아나고 등을 시켜서(8만원어치-달라로 환산하면 싸지 예?) 맛있게 먹었다.
9월 22일(화) 아버지 고향 나주 동강면, 내 고향 광주
아침 8시경 우리는 하나콘도를 나와 며칠 전 고교졸업 50주년행사 마지막 날 순천만으로 갈 때 지나갔던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우리 아버지 고향이며 묘지가 있는 전라남도 나주 동강면으로 달렸다. 십 수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준이는 쏜살같이 차를 몰았다. GPS에서 종종 속도제한을 경고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이는 기막히게 신속히 속도를 줄여서 감시 카메라를 용케 지나치곤 했다. 미국에서는 경찰의 과속 단속을 미리 알아채는 장비는 불법으로 되어있으나, 한국에서는 그것이 허용되는 모양이다. 미국에서는 경찰이 대개 하이웨이 내리막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쫒아가서 과속차량을 잡는 경찰차를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속도제한 구역을 미리 알려주고, 감시 카메라를 미리 탐지하여 속도를 줄이도록 유도하고, 그래도 감시 카메라에 잡히면 초과속도만큼 벌금통지서를 보낸다고 한다. 속도제한의 목적이 사고예방에 있지 과속을 적발하여 벌을 주자는 게 아니라면 한국이 미국보다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9년 전, 1976년 9월 3일, 미국이민으로 한국을 떠날 때 인사드리러 갔던 아버지 묘지를 찾아서 주소만 가지고 시골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건넜던 영산강이 이제는 큰 다리가 놓여있었다. 예전에 논두렁 진흙길이 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혀지고 포장이 되어있었다. 묘지를 관리해온 큰 아버지 아들, 즉 고종 4촌 형님(김영남)의 아들(김충식)인 조카가 아직 노모(형수님)를 모시고 있었다. 그때는 초가지붕이었는데 기와지붕으로 바뀌고 현대식 부엌, 에어콘, 냉장고, 개량된 화장실,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깡 촌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도 그간 꾸준히 향상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큰 아버지와 나란히 있는 아버지 묘지에 우선 소주 한잔 올리고 절 두 번 하고, 나도 한 잔 마시고, 이어서 큰 아버지 묘지에도 소주 한잔 올리고 절 두 번 하고, 나도 한 잔 마시고, 이제 영원한 삶의 나라 하늘나라에서나 만나 뵙기를 기약하며, 조카의 손을 잡고 잘살라고 당부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미국이민 떠나면서 인사드리러 찾아뵌 지 무려 39년 만에 다시 찾아뵌 셈인데 아버지 묘지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4살 때(1950년)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1980년 뉴욕에서 돌아가셨다. 조카도 7순 가까이 되어 가는데 언젠가 죽으면 누가 아버지 묘지를 돌볼 것인가?... 조카는 자식도 없는 것 같은데 그 땅은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 하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아버지 고향을 등지고 오후 2시경 준이는 광주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저녁 6시에 금남로 5가 168번지에 있는, 1942년 설립된 광주 최초 치과의원으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광산치과 제 2대 원장 - 사촌형(조의현)과 약속이 되어있었다. 광주는 내가 태어나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성장한 곳이다. 나는 10여년 만에, 집사람하고(1984년 한국 가톨릭 200주년 이후)는 30여년 만에 방문하는 셈이었다. 나주에서 광주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첩첩 산을 관통하는 무수한 터널과 잘 닦인 고속도로 덕분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후 4시경 준이는 GPS로 정확하게 광산치과 앞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여기서 2박3일간 동행한 친구 이강용부부와 줄곧 운전해준 준이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친구는 대전으로 곧바로 올라갔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일단 형에게 왔다는 것을 알리고 밖으로 나와 5.18 광주 민주화 광장(옛 도청건물이 있던 곳), 예술의 길, 등을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이제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옛 거리들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6시쯤 광산치과로 돌아가니 형이 퇴근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곧 차고에서 차를 꺼내서 우리를 태우고 예약된 식당으로 갔다. 거기에 사촌 누님(김혜신)과 매형(천영우)과 사촌 동생(조우현)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집사람도 광주에 사신다는 작은 아버지(이성희)와 연락해서 그 분도 동석했다. 모두들 십 수 년 -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고, 이제 언제 또다시 만난다는 것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다. 저녁 9시경 우리 친척들과 모임은 끝나고 사촌형은 KTX가 출발하는 송정역에서 가까운 곳에 잡아둔 호텔에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9월 23일(수) KTX(광주 송정역 - 용산역), 불어과 졸업동기 모임
오늘 저녁 6시 30분 서울 종로구 관훈동 64번지 두대문집에서 한국외국어 대학 불어과 졸업동기생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아침 8시 50분 광주 송정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타기 위해 일찍 호텔 뷔페 아침식사를 들고 택시를 타고 광주 송정역으로 갔다. 평일이라 사람이 붐비지 않고 한산한 분위기였다. 종착역은 서울역이 아니고 용산역이었다. 8시 50분 정시에 고속 전철은 서서히 움직이더니 다운 힐 스키 타듯이 미끄러지듯 역사를 빠져나갔다. 쏜살같이 달리는 고속전철의 차창 밖을 내다보며 호남선 기차를 타고 서울 올라갈 때 12시간씩 걸렸던 그 옛날을 회상하였다. 요즘 비행기로 뉴욕에서 서울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중2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가는데, 광주역에서 저녁 6시에 출발한 기차가 밤새도록 걸려서 석탄가루 뒤집어쓰고 부시 부시한 얼굴로 새벽 6시경 서울역에 도착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과거는 흘러간 지 오래다! 쾌적한 KTX 고속전철은 불과 3시간 만에 우리를 용산역에 데려다 주었다. 집사람 전화기에 설치된 지하철 지도를 보고 용산역에서 문산역까지, 문산역에서 택시로 파주 처남이 사는 아파트까지 도착하니 오후 2시경 되었다.
친구 이강용 교수와 3박4일 일정을 마치고 본거지(처남집)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불어과 졸업동기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후 4시경 지하철을 타러 문산역으로 나갔다. 처남과 집사람은 어린 시절 동네 오빠 친구(김영운)와 약속이 있어 일산역에서 하차하고, 나는 대곡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안국역까지 가야했다. 대곡역에서 반대방향 지하철을 타는 바람에 약 30분이 지체되었다. 7시경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한소영 이예구 김남희 송한식 이강용 - 다섯 사람이 이미 와서 나를 반겨주었다. 뒤늦게 차진형이 도착하여 분위기가 새로워졌다. 이강용은 나와 2박3일을 함께 지내고 어제 오후 광주에서 헤어졌는데, 오늘 저녁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서 일부러 올라온 것이었다. 졸업 후 40년 만의 재회였다. 이 모임은 카톡방을 통해 세계에 산재하는(한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동기생들이 자기 일상을 소개하며 담소하는 재미있는 모임이었다. 이강용은 대전행 막차를 타기 위해 9시경 먼저 자리를 떠났다. 식당이 문을 닫기 때문에 10시에 식당에서 쫒겨 났는데, 차진형이 선동해서 근처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 시간가량 각자 18번지 노래들을 부르며 놀았다. 차진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극진히 대해주었고 막차가 끊긴 나를 대리운전사를 고용해서 문산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학창시절에 교류가 없었지만 차진형은 이날 행동으로 멋있는 좋은 친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고맙네, 진형이! 언제 다시 만나나?... 만날 날이 있겠지?..”
9월 24일(목) 속초 - 설악산
오늘은 추석연휴 교통체증을 피해서 계획된 뉴욕에서 살다간 친구 이문원 부부와 4박5일 속초-설악산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12시에 7호선 강남 학동역 10번 출구에서 가까운 남포면옥에서 사촌 여동생(조혜영)과 누나(조흔자)와 점심약속이 되어있었다. 4박5일 등산복과 갈아입을 옷을 담은 여행 가방을 끌고 우리는 아침 10시경 이제 제법 익숙해진 문산역으로 가서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갔다. 우리 집사람을 중매한 사람이 이 사촌누나 시어머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누나는 우리를 남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누나는 인생의 저녁시간으로 7시 반인데 고상하고 멋있는 인상파 그림에 양산을 든 귀부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백작부인 같다고 농담을 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었다. 오후 3시경 사촌 여동생은 우리를 앞으로 4박5일을 함께 지낼 친구가 사는 송파구 위례성 대로 18길로 데려다 주었다. 여동생은 인생의 저녁시간으로 6시 반쯤 되었는데 서울의 복잡한 길을 잘 헤쳐 가며 운전을 곧잘 했다.
친구내외는 건물 바로 앞에 최근에 뽑은 듯한 멋있는 하얀 포셔를 세워놓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학창시절에는 교류가 없었지만 뉴욕 한국외국어대학 동문회에서 만나 10여년 사귀면서 친구가 된 고교 동창들처럼 내 이름을 “성준아”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유일한 친구다. 9년 전(2006년) 우리 부부를 산으로 인도한 친구다. 뉴욕에 거주하는 두 딸들을 보러 가끔 뉴욕에 오는 부인(아녜스)은 으레 뉴욕의 산이좋아 등산모임(http://cafe.daum.net/sanijoaUSA)에 나오곤 한다. 친구는 잘 뚫리고 닦인 고속도로를 쏜살같이 달린다. 불과 2시간 30분 만에 석양에 기우는 불그스레한 태양을 바라보며 속초시로 들어 슨다. 친구는 속초 해수욕장 안에 창밖으로 속초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아파트를 갖고 있다. 친구는 아파트에 짐을 풀기 전에 가져온 물통에 앞으로 4박5일간 마실 물을 받기 위해 약수터에 들른다. 친구는 아파트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서 속초에서 장치라는 생선 요리로 이름난 식당 해리수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이 식당은 KBS 먹거리 탐방에 소개된 바 있는 식당이었다. 아파트로 돌아오자 우리는 곧바로 해수욕장 모래사장으로 나가서 한참 해변을 따라 걸었다. 시즌이 지나서 해변은 한산하고 북적이던 사람들의 모습과 소음은 간데없고 간간이 청춘남녀들이 데이트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젊은 시절 누리지 못한 풍요롭고 여유 있는 모습들이었다. 좋은 때다!
9월 25일(금) 신흥사, 외설악 대청봉 가는 길
오전 10시경 외설악 신흥사에 도착하여 등산을 시작하였다. 신흥사에서 시작해서 비선대, 귀면암, 오련폭포를 지나 천당폭포까지 올라갔다. 대청봉까지 가기에는 너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천당폭포에서 올라온 길을 다시 돌아내려왔다. 이 친구는 절대 무리한 산행을 지양한다. 그래서 쉬엄쉬엄 여유롭게 코로 숨을 쉬며 걷는 것을 권장한다. 신흥사까지 돌아오는데 6시간 반 가량 걸렸다. 우리가 뉴욕의 산이좋아 모임에서 토요일마다 하는 산행 수준에 가까운 상당한 운동량이었다. 땀도 많이 흘리고 다리도 뻐근하고. 친구는 속초시 주민편익 시설 사우나 찜질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사우나 목욕으로 피로를 풀고 아파트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어둑어둑해진 밤길을 헤치고 친구는 20킬로 북쪽에 있는 고성으로 차를 몰아 그가 잘 아는 자연산만 취급한다는 마도로스 조 횟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생선회가 진짜 싱싱하고 맛이 있었다. 술이 술술 넘어갔다. 돌아오는 길은 취중운전을 안하려고 부인 아녜스가 대리운전을 했다. 아파트에 돌아와서 우리는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와 소주를 꺼내들고 돗자리를 가지고 아파트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닷가로 나갔다. 날씨 좋지 기분 좋지 우리는 파도가 바로 눈앞에 넘실거리는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밤의 냉기가 엄습할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9월 26일(토) 영랑호, 낙산사, 솔 비치, 남설악 주전골, 선녀탕, 금강문, 용소폭포, 오색약수, 약수식당, 산채비빔밥
어제 좀 힘들게 산행을 했다싶은지 친구는 우리를 데리고 오전에는 좀 가볍게 속초의 명물 영랑호수를 둘러보고, 관동팔경의 한 곳으로 알려진 낙산사에 입장하여 12시부터 1시까지 절에서 무료로 공양하는 막국수를 한 대접씩 얻어먹고, 낙산사 안의 여러 불당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였다. 산꼭대기에 세워진 여래상 아래서 주위를 바라볼 때 속초 해안선과 푸른색 바다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낙산사를 빠져나오자 친구는 우리를 솔 비치(Sol Beach Hotel & Resort)로 데리고 갔다. 커리비언의 리조트를 연상시키는 바닷가를 끼고 스페인풍으로 지은 격조 높은 휴양지였다. 라떼 커피 한잔씩 들고 친구는 우리를 남설악 주전골로 데리고 갔다. 두 여인은 족욕 체험장에서 족욕을 하겠다고 해서 산 아래 머물고, 친구와 나는 왕복 3시간 정도 걸리는 용소폭포까지 갔다 오는 가벼운 등산을 했다.
설악산은 산세가 북쪽의 금강산(1989년, 2004년 방문)과 비슷한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보드워크와 인공계단이 지나치게 많이 설치되어있어서 주위 경관을 해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담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또한 바위가 가파르게 솟아있고, 도처에 낙석을 경고하는 표지가 붙어있어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미국의 등산로는 일반적으로 가끔 다리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인공적 설치물을 거의 볼 수 없고 무성한 숲,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 등 자연경관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반면, 한국의 산들은 바위가 이끼가 끼어있지 않고 마치 표백한 것처럼 흰색으로 깨끗하고, 계곡의 물들이 맑아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성국사, 선녀탕, 금강문, 등을 지나서 용소폭포에서 다시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와서, 오색약수터에서 약수를 떠서 한 목음 마시고 등산로 입구에 즐비한 먹거리길로 나가니 두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자기가 잘 아는 약수식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식당주인이 산에서 직접 채취한다는 산채나물들과 더덕볶음과 식당주인이 직접 담근 술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속초 해수욕장 안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와서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돗자리와 맥주와 안주를 들고 해변으로 나가서 가볍게 출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며 밤늦도록 놀았다.
9월 27일(일) 울산암, 미시령 터널, 백담사 가는 길, 내설악 십이선녀탕 계곡
속초시를 벗어나 내설악 쪽으로 가는데 날씨가 맑아서 산봉우리들이 선명하게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친구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우뚝 솟은 울산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서울서 올 때는 일부러 꾸불꾸불 산꼭대기를 올라가서 속초시를 내려다보며 내려가는 옛길을 돌아서 오느라고 비켜간 미시령 터널을 통과하여 백담사 가는 교차로에서 설악산 입구로 들어갔다. 남교리공원 지킴터에 차를 세워놓고 친구는 설악산국립공원 안내도를 보며 외설악, 남설악, 내설악, 등을 가리키며 설악산의 여러 탐방로를 설명해주었다. 지난 이틀 동안 가본 곳(외설악, 남설악)과 오늘 오르려는 12선녀탕계곡(내설악)을 산 밑에서 두루 맛만 보여준다는 설명이었다. 우리 같은 여행객이 설악산을 두루 섭렵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친구는, 미국에서 토요일마다 5-6시간 걷는 등산하이킹 수준에 맞추어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디어디 올라갔다는 구체적 이야기는 하지 말고 외설악, 남설악, 내설악을 모두 섭렵했노라고 만 말하라고 일러주었다. 아녜스는 남편 따라 설악산의 주요 등산코스를 거의 섭렵해서 그런지 여자지만 자신감이 엿보였다. 남편이 앞에 서있는데 “등산을 가르쳐준 것을 남편에게 감사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우리는 씨앗을 쏙 빼놓은 복숭아처럼 보인다하여 일명 복숭아탕이라고도 불리는 용탕폭포까지 십이선녀탕 계곡을 따라서 올라갔다. 용탕폭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안전난간까지 올라가는 부분은 바위에 설치된 철봉가드가 있어서 그것을 잡고 간신히 올라갈 수 있었다. 안전난간에서 용탕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100미터 쯤 더 위로 올라가서 두문폭포를 바라보며 도시락을 까먹고 올라온 등산로를 따라 하산을 시작하였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계곡의 경치는 오를 때와 달리 보였다. 오후 4시경 주차장에 도착하니 등산복이 땀으로 많이 젖어있었다. 오늘은 6시간 정도 걸었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깨끗한 화장실이 인상적이었는데 땀이 많이 젖은 옷을 화장실에서 갈아입는 동안 아름다운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화장실에서 음악도 들려주고 참 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우리를 데리고 미시령 터널을 지나 속초시와 해안선을 바라보며 서울에서 올 때 지나온 길을 따라 속초시로 접어들었다. 친구는 우리를 속초시 입구에 있는 척산온천으로 데리고 갔다. 이 온천에서 푹 휴식을 취하고 나와서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가는데 오늘이 추석날이라 그런지 거리에 차량과 사람들이 제법 붐볐다.
오늘은 토종닭을 먹으려 했는데 전화해보니 오늘은 추석날이라 안 된다고 해서, 친구는 우리를 전통재래시장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데리고 갔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로 붐비는 시장에서 부채조개, 칼 조개, 문어, 등을 사가지고 아파트로 돌아오니 보통 때보다 크고 둥그런 보름달이 방금 해진 검푸른 바다위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녜스가 마지막 저녁을 시장에서 사온 해물로 준비해서 우리 넷이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돗자리와 맥주와 안주를 가지고 해변으로 나가서 보름달을 쳐다보며 밤의 찬 기운이 엄습할 때까지 즐겁게 놀았다. 이 친구는 미국에서 살 때 쥴리아 음대에서 2년간 성악을 공부했고, 친구들 모임에서 기분이 나면 멋있게 오페라 노래를 부르곤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오늘 밤도 그는 노래를 불렀다.
9월 28일(월) 38선 휴게소, 풍산역 정선 곤드레 밥집
오늘은 4박5일 속초-설악산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귀성객을 피해서 잡은 일정이어서 교통체증이 심하지는 않았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는 속초-설악산을 등지고 친구는 미시령 터널을 지나 서울로 차를 몰았다. 인제를 지나 38선상에 자리 잡은 38선 휴게소에 잠시 들려서 가뭄으로 쫄아든 강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씩 들었다. 여유 있어 보이는 여행객들로 휴게소가 붐볐다. 서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차량이 불어났다. 아낌없이 우정을 베풀어준 친구부부와 우리는 오후 2시경 3호선 종점 강남 오금역 입구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집사람은 이모님들과 오후 4시 경기도 풍산역에서 만날 약속이 되어있었다. 대화방면 3호선을 타고 대곡역에서 경의선으로 갈아타면 3번째 정거장이 풍산역이다. 여행가방을 끌고 풍산역에 내려서 두리번거리니 이모님들이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파주에 사는 처남도 차를 몰고 나와서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이름난 정선 곤드레 밥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집사람과 이모님들은 그 옛날 40여 년 전 있었던 추억을 더듬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모르는 이야기들이라 그냥 듣기만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 채 서로 헤어져야 했다. 처남이 모는 차를 타고 우리는 밤늦게 파주 로 돌아왔다.
9월 29일(화) 고모네 집, 일산역에서 재회
오늘은 오전에는 집사람의 고모님을 함께 방문하고, 나는 오후에 일산역 2번 출구에서 50주년 행사에서 만난 고교동창생들 가운데 아쉬워하는 몇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잡혀있었다. 고모님이 사시는 수원근처 병점까지 거리가 멀기 때문에 내 오후 일정에 맞추기 위해 처남은 일찍 우리를 데리고 출발하여, 오전 10시경 고모님 댁에 도착해서 다른 친척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한국으로 떠나자마자 미국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 묵고 어제 귀국하신 부산 작은 아버지(이영희) 부부, 그 아들(이재욱) 가족, 고모 딸 선초언니, 며느리, 등 여러 친척들이 연로하신 고모님이 혼자서 외롭게 사는 작은 아파트에 모처럼 모여 왁자지껄 활기를 불어넣었다. 추석음식으로 이른 점심을 들며 그간 가족근황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여러 친척들과 오전 11시 40분경 작별인사를 나누고, 처남은 내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일산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귀성객 차량으로 도로가 상당히 정체되었다. 처남은 졸리는지 한참 달리다가 갑자기 시흥 톨게이트 바로 앞에 마련된 졸음쉼터로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하이웨이 상에 가끔 Texting Station 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졸음운전의 위험을 경각시키는 표어와 졸음쉼터 위치를 알리는 표지를 볼 수 있었다. 졸음을 물리친 후 처남은 교통체증을 헤치고 가까스로 2시경 일산역 앞에 나를 내려주고, 집사람과 처남댁을 데리고 그들의 다른 약속장소로 떠났다.
2번 출구로 가니 몇몇 동창생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모임을 제안했던 친구 이인은 내가 주문한대로 일산시장 안 골목길에 이름난 순대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카나다에서 온 양재효, 독일에서 온 이병무, 한국에 거주하는 김국호, 김주형, 윤정건, 이인, 그리고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이번 재회모임에 오지 못했던 동창생, 등 나를 포함해서 8명이 모여서 낮술과 순대로 시장 통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남는 것은 학창시절의 추억과 충분한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뿐이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어 이인은 남아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웬일인지 황망히 헤어진 것을 아쉬워한다는 카톡을 보내왔다.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지만 내일 출국을 위해 보따리를 싸야하는 마지막 밤이 기다리고 있어서 처남이 사는 파주로 가는 중이었다. 지난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황토 흙이 보이는 민둥산들이 울창한 산림으로 덮이고, 전국이 사통팔달 고속도로가 첩첩 산들을 가로 지르는 터널로 연결되고, 가는 곳마다 아파트 건물들이 하늘로 치솟아 건물 숲을 이루고, 더 이상 옆으로 퍼져나갈 곳이라고는 바다(해외)와 북쪽(북한)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 그렇다. 북쪽으로 퍼져나갈 수밖에!...
9월 30일(수) 출국 - 뉴욕 귀환
우리는 오전 10시5분에 떠나는 대한항공 KE 0081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처남내외의 배웅을 받으며 이른 아침 6시에 문산역 앞에서 출발하는 공항리무진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여기저기 정차하느라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8시경으로 비행기 출발시간까지 2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체크인 줄이 길어서 짐을 부치고 출국수속까지 마치고 탑승 출구로 가니 탑승시간까지 40분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를 태운 380 비행기는 정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여 조만간 인천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이로써 나의 마지막 한국여행은 막을 내렸다. 언제 다시 오려나?...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미국에 비하면 물가도 싸고, 생활이 편리한 한국에 매력이 느껴졌다.
- 끝 -
속초 해수욕장 해변의 밤
대우 조선소
행사준비위원장 김국호
남해 해금강(신선대) 전망대에서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
금강 휴게소
속초의 밤거리
JFK 떠나기 전
인천공항 내리는 중
인천공항
파주 처남 내외
파주 처남 사는 아파트
광화문 네거리
광화문 네거리에서 신문로 쪽으로
광화문 네거리 골목식당
복원된 경희궁
옛 서울역 역사
새 서울역 역사
서초동에 있는 현 서울 고등학교
세종호텔 50주년 기념 총회장 입구
세종호텔 50주년 기념 총회모습
용돈도 주신 4촌형 내외
풍천 장어구이
서울 지하철 줄서기 모습
어린왕자와 만남
어린왕자와 나
대전 한남대 명예교수 이강용 부부
고 노무현 대통령 생가 방문
설악산 주전골 족욕체험장
고 노무현 대통령 묘지
고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
봉하마을 테마식당
부산 해운대 영화의 거리
용두산 공원 이순신 장군 동상
국제시장
부산 자갈치 시장
8만원어치 해산물
아버지 고향 나주 동강면 영산강 다리
아버지 고향 - 조카 사는 집
선산으로 올라가는 길
선산에서 바라본 마을
아버지 고향을 등지고
내 고향 광주
사촌형 - 광산치과 2대 원장
광주 예술의 거리
광주 - 사촌형 사촌 누이/매형 사촌 동생 집사람 작은 아버지
광주 송정역
KTX 고속전철 내부
용산역
불어과 1975졸업동기생들
한소영 이예구 김남희 차진형 송한식 이강용
불어과 졸업동기생 카톡방 방장 한소영
사촌 누님 사촌 동생
친구 이문원 - 아녜스
미시령 고개에서 속초시를 바라보며
설악산 신흥사
강원도 고성
자연산 사시미
낙산사
울산바위
내설악 복숭아탕
추석날 밤 속초해변위에 떠오른 달
서울지하철 3호선 종점 강남오금역
경기도 풍산역에서
집사람의 고모님
고모님댁 창문밖 광경
시흥 톨게이트 앞 졸음쉼터
일산시장 골목식당에서 재회
일산역 앞에서
인천공항행 리무진
출국전 인천공항
용돈도 주신 사촌형님 내외
의사 이상호 동창생
윤정건 동창생
뉴욕에서 살다 간 이광호 외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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