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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October, 2011

도전과 응전 2005

2005년 1월 13일 한국일보 평통 차세대 부회장 김성준   영국이 낳은 20세기의 석학 토인비는 문명의 발생, 성장, 쇠퇴, 붕괴가 결정되어 가는 과정을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새로운 역사철학을 정립한 사람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개인이거나 집단이거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도전과 응전의 끊임없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도 그 개인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의 결과이며, 국가나 민족에게 있어서도 그 국가나 민족에게 끊임없이 닥치는 도전과 그에 대한 응전의 결과가 그 민족의 흥망성쇠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상상력과 용기에 따라서 같은 조건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맺는 다양성의 장이 인류의 역사의 무대라 할 수 있다면, 때로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도전 앞에서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는 슬기와 끈기가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응전이 요구되기도 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요즈음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의 진전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한반도 주위의 4개 열강(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들의 활동들을 예의주시하면서 떠오르는 화두가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이다. 19세기의 서세동점의 결과로 우리 민족에게 덮쳐온(무지하고 무능했기 때문에) 일제강점시대도,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제의 종말과 더불어 졸지에 찾아온 해방 아닌 해방(우리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시작된 지난 60년간의 분단시대도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 앞에 다가온 도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응전을 하지 못한 무능력의 대가가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과거는 지나갔고, 그 지나간 과거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도전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돌아가는 여러 가지 주변정세를 볼 때, 우리 민족 앞에 놓인 도전의 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04

고국 방문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04년 10월   이번 여행은 평통 사무처가 서울에서 주최한 북미주, 구 소련지역 및 유럽에 거주하는 평통위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가족을 동반한 대통령 면담과 금강산 일일관광을 일정에 포함하고 있어 빽빽한 일정이지만 여러 해외지역에서 거주하는 펑통위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기회가 되었다. 나는 작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 소집한 국내외에 거주하는 모든 평통 위원들의 전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초선 위원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언제나 베일에 싸였던 청와대를 생전 처음으로 방문하고 내 나이또래의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 손도 잡아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불과 1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또다시 방문하겠다는 나를 불만스런 눈초리로 째려보는 아내의 눈초리를 따갑게 느끼면서도 가야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남한 사람들에게 반세기동안 금단의 땅으로 여겨졌던 북한 땅의 일부인 금강산을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육로로 갖다오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1984년 봄에 미국에 이민 온지 8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해외동포로서 북한이 파놓은 땅굴을 관람하고 판문점을 방문하여 북쪽을 바라보며 기구한 우리 민족의 운명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89년은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 연방이 해체되던 해였는데, 우리 한반도에서는 남한의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오자, 남한의 학생 임수경과 그녀를 동반한 문규현 가톨릭 신부가 판문점을 통과하여 벌집을 쑤셔놓은 듯 온통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기였다. 그 해 뉴욕에서 결성된 이산가족찾기 후원회 회원자격으로 나도 1989년 가을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들어가 원산과 금강산 일대를 관광하고, 개성과 판문점을 방문하여 그 때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적이...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다녀와서 1984

출발(1984년 4월 30일 화요일)   얼마나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던가! 특히 아내는 4년 전 한 아이와 함께 다녀온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남편과 더불어 자랑스러운 세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간다는 기대에 들떠있었다. 나로서도 7년만의 방문인지라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우리가 탔던 대한항공 전세 비행기는 북미 동부지역의 각지에서 모인 교우들로써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엔진 소음과 어수선한 분위기가운데서도 동승한 신부님들의 강론이 줄곧 계속되었고, 앵커리지 공항 대합실에서는 고백성사를 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캄차카 반도 근처의 상공을 지날 때는 1983년 9월 22일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주도하는 미사가 거행되었다. 기상강론, 기상성찰, 공항 대합실에서의 고백성사, 그리고 기상미사와 영성체 등 좀체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설레고 술렁이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 한 마음 한 뜻을 이루고 있었다.   103위 시성식(1984년 5월 6일 일요일)   이날 여의도 광장에 운집한 100여만 인파중의 한 사람으로서 군중속의 한 사람으로서 목격한 장면은 나의 뇌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아니할 감동적인 한편의 영화 같은 것이었다.   이날 해외교포들은 여의도 윤중 중학 교정에 아침 5시30분까지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장인과 장모는 시흥동 본당소속이었는데 벌서 3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나와 아내는 4시 30분쯤 아직도 캄캄한데 집을 나섰다. 한길로 나갔는데도 캄캄했고, 쏜살같이 지나다니는 화물트럭과 택시들의 명멸하는 불빛만이 눈에 띄었다. 가로등은 에너지 절약 시책으로 자정이 되면서부터 꺼져있었다. 버스는 아직 다니지 않는 것 같아서 우선 택시를 불러 타고 여의도 쪽으로 달려가는데,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흰 옷을 입고 하나둘씩 나오는 여신도들의 어렴풋한 모습들이 눈앞을 지나가는데 마치 숲속에서 요정들...

해외동포가 설 자리 1989

북녘을 방문하고 1989년 10월 조국평화협회 총무 김성준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해야   나의 북조국 방문동기는 멀리 남조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옴으로서 비로소 남북을 하나로 인식하게 되는 해외동포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연유한다.   우리 민족이 외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의 아니게 짊어진 분단이라는 질곡을 탈피하기 위해서 정치적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북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함으로서 통일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해외동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방북을 준비하고 실천케 한 원동력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람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 나의 방북은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명예훼손과 신체적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갔던 민족통일에의 길을 나도 밟고 지나가는 용기를 주시고, 말로만 듣던 북조국을 편견없이 보게 해주기를 비는 기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떠나기 전전날 나의 방북계획을 알고 찾아온 배종섭신부와의 대화와 그의 강복기도는 나의 결심을 더욱 정당하게 굳혀주었다. 배신부는 미국사람이지만, 우리 한국사람 못지않은 분이다. 서울 김수환 추기경께 사제가 없는 북조국의 평양 장충성당에 임시 본당신부로 일하기를 허락해주기를 청원하고 회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질 때 배신부는 “북쪽에서 형제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빌어주었다.   멀고도 가까운 길   비행시간만 뉴욕-동경 14시간, 동경-북경 4시간 30분, 북경-평양 1시간 30분 도합 20시간이 걸렸다. 비행기 사정에 따라서 가며오며 북경에서 하루 이틀씩 묵어야 한다. 가까운 길을 멀리멀리 돌아서 갔다. 거리만 먼 것이 아니라 시간도 더 걸리고, 돈도 더 들었다.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느냐”는 표어가 목구멍으로 치민다. 서울서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국을 찾는 해외동포가 일본과 중국에 돈과 시간을 뿌려...